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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하여 1년 수학한후 애국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만주 봉천 하얼빈 길림등지를 찾아가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민족적 사회주의 이념으로 일제에 투쟁하기로 뜻을 같이하고 다시 일본 히로시마로 건너가 학문을 배우려고 고학을 하시다가 귀향하시어 조선일보 부여지국에서 기자로 활동하셨다. 또 안재홍 조병옥님이 주도하는 민족사회주의 항일단체인 신간회 부여지회 회원으로 활동하셨다. 1929년 1월 15일 홍산에서 금강 연안 각지의 우수한 청년들로 결성된 금강문인회 이호철 유기섭 노명우 오기영 최재봉 조병순등 32명과 함께 부여 중정리 규함 합송리, 홍산 조현리, 북촌리, 남면 마정리, 운산 고부실, 장암 장하리등지에서 농민야학을 통해 농민 자제들에게 민족적 사회주의 이념념과 항일투쟁의식을 계몽하셨고 1933년 4월에는 유기섭, 이호철, 노명우 최재봉지사님들과 함께 칠모회를 조직하여 가일층 항일 민족혼을 계몽하다가 9월 하순경 일경의 삼엄한 감시를 받던중 금강농민회와 칠모회 사건으로 일경에게 피체되어 공주형무소에서 징역 1년 6개우러에 집행유예 5년을 언도를 받고 3년의 실형을 복역한후 출감되셨다. 그 후 일경의 삼엄한 감시로 인해 계몽활동을 중단하고 처가의 향리인 세도면 청포리로 이거하여 침제된 금강농민회 조직의 부활을 도모하며 농경에 종사하시다가 해방을 맞으셨다. 해방후 좌우익으로 나뉘어 대립하던때에 는 몽양 여운형선생 계열의 건국준비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나 뜻대로 되지않았고 1950년 6.25사변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사건으로 예비검속을 당하여 40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하셨다. 유족으로는 배위 김해김씨 순안님이 계신데 1927년에 63세로 돌아가셨고 아들 철민 용모 따님 영자 경희 경옥 화자 자부 송순례 김혜숙 ....지사님의 아들 철민과 용모는 선친의 애국항일운동에 관한 증거자료를 추적 조사한 끝에 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