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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섭과의 은밀한 연계를 시발로 청산의 생애는 광복을 위한 구국의 대열에 심혈을 경주하였다. 약관에 경성 갈돕회 강석동의 밀유와 공의 재종형 병환의 권유로 전국에 파급되던 문맹퇴치운동에 참여하여 장정학당의 언문강사로 활약하고 배일사상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면서 원유회라는 조기회를 가장하여 지하운동을 전개하였으니 기록상의 투쟁경력은 구국비밀만체로 항일 대한독립 신간회와 백마강 조개섬을 거점으로 삼은 금강문인회 부여농민 구락부등에 조직구성원으로 당시의 동아일보기사나 형사기록에서 변함과 같이 청산께서는 평생 배일 일념의 애국지사이다. 계유년 12월 항일운동을 강화함에 따라 기밀이 일경에 누설되어 애국지사 노명우 이호철 강성모등 9명과 연계자 18인이 체포구금이되니 치안유지법위반으로 2년간 혹독한 옥고를 치루고 을해11월 형집행판결이 되어 공주형무소에서 집행유예로 출감은 하였으나 심한 형독으로 실의와 체념을 삼키며 북만 황야로 유리방랑의 허송 10년에 광복의 빛은 보았으나 가재는 온진되고 비참한 현실에 울분의 나날을 보내다가 갑자는 11월 16일 졸하니 형수 69세이며 북비리 강영촌 발학치 선산 하해좌에 안장하셨다. 유족으론 실인 김해김옥순과 영식 현철 존사 규정과 규응이요 ...이다. 청산이 귀천한지 익년 다행이도 정부로부터 공적을 인정받아 병인12월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니 청산지사의 평생을 통한 서뭉여기하신 후덕의 보답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