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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성 소동파는 흘러가는 역사속의 무상한 인생을 탄식하면서 奇蜉蝣於天地(기부유어천지)하니 渺蒼海之一粟(묘창해지일속)이라 했다. 마치 하루살이 마냥 천지간에 엉크러져서 아무러한 일 한가지 해논것 없이 무의미하게 살다가 죽어버리는 인생은 망망대해 창해바다에 던져진 좁쌀 한알 같다는 말이다. 과연 옳은 철학이다. 이 세상 수천억 인구가 북대기를 치다가 보람있는 일 하나 하지 못하고 그대로 하루살이처럼 스러져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임병직박사는 실로 사람다운 일을 하며 살다가 고고하고 청빈하게 세상을 떠난 분이다. 그는 80평생을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애국투사가 되었고 일편설의 명 외교로 국운을 모면한 분이다. 박사는 구한말 갑오경장이후 일제의 침탈로 삼천리 강산의 전국토가 이족에게 병탄되나 망국소년의 비분은 나라안에서 평안하게 살수 없었다. 약관 미청의 소년으로 고국을 등지고 미주에 망명하여 1920년에는 오하이오 주립대학을 졸업한 후에 워싱턴에서 이승만박사와 함께 독립운동에 앞장을 섰고 혹은 이박사의 임시정부 비서관으로 혹은 한미친선위원으로 혹은 임시정부 구미위원장으로 대한민국이 광복되기까지 20여년간 독립외교로 청춘시절을 송두리째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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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이 회복되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외무장관의 중임을 맡아 파란만장한 건국 초기의 어려운 외교를 담당하였고 6.25동란이후 1951년부터 1960년까지 10년간은 유엔대사로 공산국가와 설전을 벌리면서 능란한 수완을 발휘했다.1964년에는 재건국운동 본부장으로 다음해에는 주 인도대사로 1968년에는 국토통일원 고문으로 1971년에는 한국외교협회 회장으로 또는 한미협회 고문으로 1974년에는 반공연맹 이사장으로 1976년에는 세계반공연맹 총회 의장과 아세안 민족 반공연맹 총회 의장으로 활약하여 80평생을 다만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쳤다. 슬프다 1976년 9월 21일 홀연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84세다. 묘소는 동작동 국립묘지이다. 동지들은 한평생을 나라위해 바친 박사의 애국정신을 추모하여 박사의 고택 유허에 추모비를 세워서 역사상에 영생한 박사의 영을 위안한다. 때 마침 정부수립 30년을 맞이하여 이 비를 세우니 박사를 추모하는 마음 더욱 간절하다. 1978년 9월 21일 임병직박사 추모위원회 삼가 비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