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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一獨立運動紀念碑(3.1독립운동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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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은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와 빛나는 전통을 면면히 계승해 오면서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숭상해 온 백의민족이다. 지리적 여건상 수많은 외침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백절불굴의 의지와 불타는 애국충정으로 삼천리 금수강산을 지켜왔다. 그러나 19세기말에 이르러 야만적인 일제의 침략은 우리 역사의 권위와 민족자존의 긍지를 짓밟았으며 급기야는 한일합방이란 명분 아래 36년간 강점 통치하는 치욕스러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요 백척간두 누란의 위기에 처하였음에도 일신의 안위와 부귀공명을 부운시(浮雲視)하고 귀중한 생명을 초로와 같이 여기시면서 조국광복의 숭고한 대의 앞에 분연히 일어선 고결한 애국지사들의 3.1운동은 영원히 겨레의 가슴속에 고동치고 있다. 천지를 진동시켰던 기미독립만세의 우렁찬 함성 대한의 강토를 뒤덮었던 태극기의 물결은 온 세계에 우리나라가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하고 확인받기에 충분했다. 그 장엄했던 3.1운동도 어언 80여 성상이 지났고 일제의 탄압에서 해방된지도 59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회고하건데 오직 조국광복의 일념으로 구국의 횃불을 들고 분연히 일어선 선열들께서는 일제의 잔악무도한 말살정책으로 인하여 혹은 옥고에서 혹은 왜경의 감시 속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시면서도 초지일관으로 항일투쟁을 해오신 충혼은 조국광복의 위대한 대업을 이룩하셨으며 오늘의 민족정기와 국가 중흥의 초석이 되었으니 참으로 장하시고 경모할 일이다. 우리 부여 고장의 유일한 독립운동으로는 백마강 남쪽에 위치한 현재의 세도면 청포교회인 창영학교에서 알차게 결실한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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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 3월 5일 전북 익산군 웅포면 대붕암리에 거주하는 군산 영명학교 강금옥씨로부터 연락을 받고 창영학교 선생인 엄창섭씨와 고상준씨 추병갑씨가 주동이 되고 김종갑, 추성배, 강세형, 윤동만, 정근섭, 서삼종, 한규섭 제씨들의 협력을 받아 현 세도면 청포리에서 수일 철야 태극기를 제작하여 3월 10일 오전 10시 강경 봉오재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후 당시 일본인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홍교동을 중심으로 구름같이 몰려드는 동포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면서 민족의 의분을 터트리던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하늘과 땅이 진감하였다. 이에 왜경들은 우리 동족들을 체포 구금하고 창영학교를 폐쇄하였으며 동리 사람은 모진 매와 감시를 당하였고 특히 주모자들은 불법재판으로 엄창섭(28세) 징역 2년 고상준(20세) 추병갑 징역 1년 강세형, 윤동만, 정근섭 징역 8개월, 김종갑(24세) 추성배(19세) 징역 6개월의 언도를 받고 투옥되었다. 자고로 국가흥망의 역사 위에 의인 열사의 고귀한 피는 항시 후손들을 계감케 한다. 오늘날 선열들께서 남기신 업적은 천추에 빛나고 백세를 일깨우는 귀감이 되기에 넉넉하다. 풍우 당년의 크나큰 민족의 설움은 아직도 우리 민족의 뇌리에 생생하거니와 선열들의 독립정신은 온겨레의 마음속에 되살아나서 정중하게 추모하고 길이 후손에게 전하여 희망찬 미래를 개척코자 뜻있는 지방인사들이 1976년 청포마을에 기념비를 세웠으나 왜소하고 퇴색되었기에 부여군청의 지원을 받아 재입비하도다. 서기 2004년 8월 30일 3.1독립운동기념비건립추진위원장 백여기, 부여군수 김무환 근찬, 세도면장 박해용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