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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一水 盧公 明愚 求國記跡碑 (고 일수 노공 명우 구국기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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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扶餘) 사람이다. 공주읍에 소재한 영명학교(永明學校)에 재학중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항일전단 천여매를 인쇄한 후 동지 유준석(柳俊錫)과 함께 각자 전단 백매씩을 휴대하고 4월 1일 공주시장에서 전단을 살포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들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이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혀 동년 8월 2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조선일보·동아일보·중외일보·중앙일보 등에서 기자와 지국장을 지냈으며, 부여농민학원(扶餘農民學院)을 창설하고 이를 후원하기 위해 농민청년회(農民靑年會)·농민조합을 조직하였다. 1930년 3월에는 고향에서 19명의 동지들과 더불어 금강문인회(錦江文人會)를 조직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폈다고 한다. 또한 1931년 봄에 이호철(李戶喆)·유기섭(柳基燮)·장창선(張昌善)·오기영(吳麒泳) 등과 함께 부여군 홍산면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고 항일독립운동을 펼 것을 목적으로 농민조합의 조직에 착수하였으나 일경의 취체가 심하여 중단하였다. 이들은 또한 동년 7월 청년들을 규합하여 부여농민조합연합회(扶餘農民組合聯合會)의 지부로서 대야구락부(大也俱樂部)를 조직하고 이의 확대강화에 힘쓰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붙잡힌 지 2년 만인 1935년 11월 2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형을 언도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