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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나 조선일보 지국장 노명우 지사를 비롯한 청년층과 유력인사들의 검거선풍이 일었다. 아울러 구국비밀결사를 모의키 위하여 백마강 조개섬에서 연합단체 신간회 금강문인회 농민구락부 등 주역들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선전선동 정보교환 문맹퇴치를 위한 논의에 젊은 강지사는 적극 봉사키로 야학 강사위촉을 받았다. 항일의 틀은 계속되다. 서기 1933년 12월 7일 일제 검거때 동지 강일구 최재봉 장창선 전영철 강병국 조병철 허원범 노명우 강병환 강도성 강성모 등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공주지방법원에 송치된 대사건이었다. 강지사는 서기 1935년 11월 20일에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형의 판결을 받고 출옥은 하였으나 2년간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출옥 후 형독을 치료하다가 서기 1937년 만춘에 만주 간도성 연길현으로 이주하였다. 수차 검속되어 회유와 고문 훈방을 거듭하다. 서기 1940년 8월 6일 영서하시니 짧은 26년의 생애였다. 진실은 영구히 묻히지 않고 발은 빛은 영원 굴절이 없는 이치일지니 서기 1986년 12월에야 대통령표창이 추서되고 4년이 경과한 1990년 10월 16일에 건국훈장 애족장 제524호를 추서하시니 유명을 달리한지 51년만이었다. 묘는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1묘역 191기에 안장하셨다. 배위 경주 김선월님은 갖은 고난의 반세기를 부덕을 가꾸시며 남매를 육성하시고 고절의 생애를 종하시니 생전의 대전시 중구청장의 표창패 제64호와 함께 강지사 곁에 합부하셨다. 유족으로는 자 현준과 자부 김풍실이 있고 녀 연숙과 서 김령 김정일이다. 장손 규석군은 서울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스웨덴대의 4년 유힉을 마치고 농학박사 교수로 국가에 공헌하고 있고 차손 규상군은 고려대를 졸업하고 서울철도기관사로 사회에 봉사중이며 손녀 손부들은 초중고 교사 재직중이니 일익가세화목하고 번창하니 어찌 지사님의 음덕이 아니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