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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 노명우, 강일 오기영, 서진정, 유기섭, 조병철 제항이투사와 모의하여 당시 민족지인 중앙일보사의 지국을 부여에서 개설하여 왜정을 통렬히 비판하며 지방인사 청년들에게 민족사상의 계몽선도에 전력을 다하였으며 동시에 항일 독립단체인 신간회 부여군지부와 금강문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던중 서기 1933년 8월 10일에 체포되어 공주형무소에서 모진 옥고를 치뤘다. 선생께서는 삼엄??한 왜경의 감시하에서도 태산의 반석과 같이 자약무득 때로는 덕숭산수덕사에 입산수도하였고 또한 대종교를 신봉하여 단군성조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의 철학적 연구와 민족정기 고양에 전력하였다. 왜정의 악독한 고문과 백방의 회유는 선생으로 하여금 더욱 설한송죽의 위국단심을 굳게하였으며 세업으로 이어받은 전재산은 독립항일투쟁을 위하여 귀중하게 승화시켰다. 서기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조국의 해방은 왔다. 그토록 바랐던 조국광복이 선생의 안전에 전개한것이다. 이날을 보기위하여 고쥐한 벽혈을 조국에 바친 순국선열앞에 고개를 숙였고 또한 형극으로 이어진 자신의 행로가 무위가 아니었음에 보람을느꼈다. 이로부터 선생께서는 조국의 완전독립을 위하여 정치활동에 몰두하였으며 홍익대학에서 상의도 하였고 초대 충청남도 의회의원에 피선된바도 있었으나 매사 여의치못함을 통탄하고 야인으로 물러앉은 후로는 오로지 우국새정으로 나라의 강성과 후생의 애국정신 함양에 몸과 마음을 바쳤다. 선생께서는 일찍부터 민본주의, 사민평등을 주장하여 몸소 실천하였으며 문학, 철학, 사학, 종교, 정치, 경제의 각분야에 ?학하였고 특히 추심추물양론에 깊은 연구를 가하여 배달정신의 바탕위에 심체물용의 원리를 세워 대한민족의 활로를 찾았으며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