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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인 항일투사가 단합하여 농민의 문맹퇴치를 빙자 각동리에 야학당을 개설하여 민족사상과 항일정신을 심으며 민족의 활약에 몰두. 항일단체인 신간회 부여군 지부의 금강문인회를 조직, 일명을 홍모와 같이 가볍게 생각하고 충남 부여군 부두리 평야 갈대밭에서 선생 외 4인 항일투사가 동양척식회사 다목농장 왜경 경찰서를 파괴 결의밀회가 탄로되어 호칭 충남 비사사건이란 명목으로 애국청년 백명도 일경에 피체되었으나 다수 동지는 석방되고 선생은 대전경찰부에 감금되어 극악고문에도 위국단심 불굴항거하다가 왜적의 비인도적 악형으로 선생의 열손가락 손톱과 열발가락 발톱을 펜촉으로 욱이고 집게로 뽑아 전무케 하였으며 선생은 기후 송국되어 공주형무소에 구검케하고 예심에 회부 서기 1936년 6월 만 3년 1개월의 옥고 끝에 5개년 집행유예로 출옥되었으나 우국충정으로 나라의 융성과 후생의 애국정신 함양에 전념하였으므로 예비검속은 항상 선생의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며 장렬한 충혼을 낱낱이 열거하기 어려우나 위공을 회고하고 추앙할수록 민족의 가슴은 비분하고 통절할 뿐이다. 유전 전재산은 독립항쟁에 귀중하게 승화되었으나 서기 1945년 8월 15일 그토록 바라던 조국광복이 선생의 안전에 전개한 것이다. 그날을 보기 위하여 고귀한 벽혈을 조국에 바친 순국 선열 앞에 고개를 숙였으며 또한 이어진 자신의 행로가 무위가 아니였음을 보람으로 여기고 서기 1950년 5월 5일 향년 42세를 일기로 귀천하시니 조국 통일을 보지 못함이 한이었다. 선열들은 반드시 조국의 번영과 통일을 조감하시리라. 미망인 광산 김영매 여사는 선생과 결혼하여 독립운동 비밀지하 활동 연락에 적극 내조하였으므로 왜경의 협박과 위협으로 정신마저 혼미하고 청각마저 상실 고생하시며 극빈가정에서 형독으로 고생하는 선생에게 타에 지표가 될 부덕을 쌓았으며 애국지사의 열부에 정도를 다하고 서기 1970년 8월 28일 귀천하셨다. 선생과 김여사의 자주민의 강의와 민족정신을 만방에 과시한 충절은 겨레의 생명과 함께 빛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