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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의거를 주도한 박용화씨집(충화면 팔충리 수철)에서 합숙하고 일반인은 6일 새벽에 모여 유천읍을 향하여 가니 이때 모인 군중이 50여 명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첩첩산등성길 20리를 걸어 임천관아가 보이는 솔고개에 이르렀을때는 10여 명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다시 회합하여 「두려운자는 빠지라」하니 최후까지 남은 분은 7인 뿐이였다. 오전 10시경 임천읍민을 선도하여 읍내를 시위하고 부여헌병대 임천분소에 이르러서는 「조선은 이미 독립했으니 너희들은 정권을 내놓아라」고 외치고 항거하다 체포되여 부여헌병대를 거쳐 공주지방법원(1919.4.4 - 5.2)에서 재판을 받고 형을 받았다. 7인의 성명(나이) 주소 형량은 박용화씨(39) 충화면 팔충리 공소로 감형 7월, 박성요씨(29) 충화면 팔충리 징역 일년, 황주경씨(45) 임천면 비전리 징역 일년, 문재동씨(52) 내산면 걸지리 징역 7월, 최용철씨(35) 충화면 팔충리 공소로 감형 6월, 황금채씨(40) 임천면 비정리 태형 60, 정판동씨(26) 충화면 팔충리(본적 서산군 남면 몽산리) 태형 60이였다. 그 중 정판동씨는 독신으로 멀리 서산에서 출가해 온 외로운 누님(정열희 부 박성순)의 의지가 되기 위해서 이웃해서 살았으나 세가 어려워서 징역 2월을 태형으로 환형 60대를 맞고 집에 돌아와 득병사하니 절손됐다. 당시 조직화된 집단 항거는 부여군내에서는 오직 이 의거뿐이었다. 그 후 이 7인의 가정은 일제 36년간을 보안법 위반의 요시찰인으로 지목되여 박해를 당했으니 가세가 쇠퇴하여 지금도 그 후손을 찾을 수 없은 분들이 대부분이다. 나라가 광복된지 반세기가 지난 근래에 이르러 이 의거 사실을 기념하고 선열에 대한 추모사업을 일으켜 줄 것을 군내 요로와 요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