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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수학하면서 재해외 조선인 유학생회의 활동을 주도하는 등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1918년(24세)때 애국동지들을 규합하고자 국내에 들어왔다가 군산에서 왜경에게 체포되어 심란 고문을 당하고 수감 중 한인 순사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상해로 돌아갔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부터 3년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동시에 의정원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임시정부 발행 국채를 가지고 국내에 들어와 거액의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때 선생은 전북 출신인 김인전 목사 임시정부 정부의정원 의원 윤건중 등과 교우하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21년(27세)때 상해 임시정부에서 파송하는 유학생 16명을 인솔하고 독일에 유학하여 뷔이그즈대학에서 4년간 물리학을 전공하였다. 당시 형편이 어려워 안봉근님(안중근 의사의 동생)의 주선으로 산토실링 수도원에서 몇 달동안 기식한 일도 있으며 온갖 난경을 극복하고 면학하는 가운데 4년동안 독일 유학생회(유학생 68명) 회장을 맡아 크게 활약하는 등 실력과 덕망이 출중하였다. 1926년(32세)때 서울로 돌아와 배재학교 교감으로 봉직하다가 왜경의 미행과 강압에 견디다 못해 6개월 후 북간도 용정으로 건너가서 동흥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7년(33세)때 학우 윤건중 님의 권유로 귀국 한국인의 자력으로 전북 완주군에 처음 설립된 봉상산업조합의 이사가 되어 민족자본의 육성과 임시정부 자금 마련에 진력하였다. 그러던 중 불의의 부상과 과로로 신환을 얻어 1938년 8월 15일 45세의 일기로 애석하게도 영면하셨다. 대한민국정부는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생의 애국적 생애를 높이 평가하여 1993년 광복절에 고인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 일제에 강점당한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하여 고난의 일생을 살다가신 선생의 애국적인 삶은 이 나라의 역사에 길이 빛날 것이며 만인의 가슴속에 영생하는 귀감이 될 것이다. 2001년 4월 13일 산민 한승헌 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