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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선생의 높은 애국심을 찬향하는등 아름다운 일화로 향리에는 전해지고 있다. 1923년 1월 독립운동계에서는 당연 중요행사가 되는 국민대표회의가 상해에서 개최되었다. 전라도 대포로 참석한 선생은 각지역및 단체의 대표자들과 조국광복의 새로운 방략모색과 독립운동세력의 통폐합등을 위한 토론을 2월, 3월에 걸쳐 연일 벌여가느라고 피로가 겹으로 쌓인데다가 4월에도 그만큼으로 중요한 일이 선생에게는 또 있었다. 한국노병회 제1회 정기총회에서 자금 51원을 모금 독립군사령관 김규식선생에게 보내는 일이었다. 그일을 담당할 위원으로 선생등 8인이 선임되었는데 동지들과 더불어 국가의 장래를 토론하는데만도 2,3일에 걸리고 그때마다 선생은 강개로 지친 심신을 가느지 못하고 급기야 졸도에 이르렀다. 그러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몸이 되어 다음달 5월 12일에 상해동인병원 에서 48세를 일기로 역책하시었다. 유해는 상해 프랑스 조계 내외인 묘지에 안치되었다가 후일 중국정부에서 이장하여 상해 송경령능원에 다시 안치되고 1993년 박은식, 신국식, 노백린, 안태국선생등과 함께 고국으로 봉환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보다 먼저 1980년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높이사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제 선생의 향리를 중심한 서천군민의 뜻을 모아 여기에 선생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