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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선생은 동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나라잃은 동포를 구해야 한다는 민족운동의 의지를 더욱 굳건히 하였을 뿐만아니라 동기생이던 송병조선생과는 평생의 지기이자 동지가 되고도 하였다. 매일 수업이 있는 학교가 아니므로 선생은 재학중에도 향리에 있는 완폰교회의 장로가 되고, 군산영명학교의 임시교사가 되기도 하며 젊은 이들을 상대로 하는 배일 민족의식의 고취가 선생의 일이 되는것은 어느곳에나 같은 것이었다. 졸업후에는 전주 서문외교회의 목사가 되어 이번에는 그곳에 모여드는 젊은이들을 상대로 기독교의 진리에 입각한 배일 민족주의의 애국사상고취가 선생의 일이었다. 특히 선생의 설교는 언제나 일제의 압제에서 고통을 받는 우리민족을 구워하는 일이 곧 없는자, 못가진자를 사랑하는 기족의 정신이다-가 주제가 되었다. 선생의 못가진자를 사랑하는 기독의 정신은 말뿐만이 아니고 실제로 선친이 매년 인근의 수백빈민을 상대로 아민을 먹이는 일을 하기때문에 듣는이들에게보다 실전을 더하는 설교가 되기도 하였다. 선생이 담임하는 교회에는 인근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등의 교사 와 학생이 자리를 매웠다. 교사들은 선생의 영향으로 그들의 학교에서 암암리에 민족교육을 실시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학생들은 비밀리에 독립단체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중 하나가 기천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조직한 독립운동비밀결사단인 송죽형제회였다. 이런중에 1919년 3.1운동의 해가 되어 선생은 담임교회가 있는 전주와 향리에서 동시에 동운동을 추진지도하였다. 전주에서는 스스로 선두에서 고향리인 서천에서는 한영학교 제자들이 앞장섰다. 유명한 사천 마산 새장터의 시위운동자들이 모두 한영학교 또는 완보교회 출신들이었던것은 당시의 기록들이 지금도 여러곳에 남아있다. 마신신장리에 동아일보사 후원으로 세워진 3.1운동기념탑에도 그 기록은 있다. 3.1운동이후 일제의 탄압과 감시가 심해지자 선생은 중국 상해로 망명 그곳 대한국임시정부에 합류 활동하였다. 1920년에는 상해대한인민거류민단 의원 17명중의 1인이되고 임시정부의정원 정무, 조사특별위원이 된다.1921년에는의정원 부의장, 전원위원장이 되기도한 다. 특히 이해에 선생은 임시정부의 학무차장, 총장대리가 되고 상해교민단에서 운영하는 인성학교 교장도 되는데 이는 후일 해공 신익희선생이 술회한 바와같이 선생의 학문이 그만큼 깊었던것을 말해주는것이된다. 1922년 4월에는 의정원 제4대 의장에 선출된다. 이후 선생은 의정원의장으로 민의를 수렴한 입법활동, 임시정부의 유지강화, 독립운동의 활성화에 온 힘을 쏟았다. 이해 10월에는 김구, 김인전, 조상섭, 이유필, 여운형, 손정도, 양기은등 7인이 한국노병회 조직하기위하여 발기인이 되고 그중 글에 능한 김인전, 이유필이 기초위원이 된다. 이 일은 결국 성삭되어 선생은 한국노병회(이사장 김구) 이사가 되고 경리담당이사를 겸하게 된다. 그로써 선생은 장차 구국의 군인 양성을 위한 자금을 조성하는데의 책임자가 된다. 이때 선생은 향리의 사잴글 모두 처분하여 상해임정의 보녕회 기금에 충당한다. 그 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