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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휘는 인전이고 경재는 그의 호이다. 김해김씨 탁영자 김일손 선생의 15대 손으로 1876년 충남 한산면 지촌에서 부친 김규배공과 모친 김씨사이의 2남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시이래 향리 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이후 유,불,도 3교를 학문으로 연구하여 경지에 이르기도하였다. 후일 상해임시정부에서 만난 한학, 서예에 두루 능한 해공 신익희선생이 나는 "경재선생에게서 한학을 다시 배웠고 구분의 학덕에 감복하였다"고 술회한바 있는 것으로 선생의 한학을 가름하고도 남는것이된다. 유청소년기를 향리에서 학문으로 보내며 30대에초반이 된 선생의 이때가 마침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오조약이 체결되어 나라가 실로 풍전등화와 같은 때였다. 부친 김규배공이 수원군수를 역임하고 월남 이상재선생과 같이 황성기독교 청년회에도 가입한(1904년) 선각자로 향리의 집안이 서울소식에 밝았다. 선생은 즉시 사숙에서의 학문을 폐하고 대신 향리에 한영학교를 개설 인근의 청소년들을 모아서 애국심함양과 배일독립정신의 고취가 선생의 일이되었다. 그러나 그런중에도 일제의 만행은 그 보속이 빨라서 마침내 1910년 결술 한일합방의 날은 오고야 말았다. 선생은 그해에 한영학교를 계부에게 인계하고 장차 목회자가 되기위하여 부랴부랴 멀리 평양까지 가서 그곳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는 조국과 민족의 현실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신과 희생을 요구하는 상황으로 급변하고 있는것을 인식 그를 배워 실천하기위한 것이었다. 동학교는 후일 3.1운동에 민족대표로 활약한 이승훈선생과 길선주, 양전백 목사 그리고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역임한 송병조선생등 많은 민족지도자를 배출한 서북지역 독립운동의 요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