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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경재 김인전 선생 공적 서천이 낳은 김인전 선생(1876~1923)은 중국의 고전에 통달하고 서예에도 능하였다. 그는 유교, 불교, 도교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30대초에 서천군 화양면 와초리에 한영학교를 설립, 국권회복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였다. 나라가 일제에 강점당하는 시기에 평양신학교 제1기생으로 입학하여 완포교회를 세워 목회자로 시무하며 구국투쟁에 전념하였다. 그는 서천을 비롯하여 군산, 전주등지의 학생들을 고무하여 3.1만세운동에 막후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충남, 전북 일대의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일제의 탄압과 감시가 그심해지자 그는 1919년 이후 가산을 정리, 상해로 망명 이곳에 있던 이동녕, 김구등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자와 함께 입법, 행정업무에 진력하는 등 광복정책을 착실히 펴나갔다. 1920년 이후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전라대표의원, 부의장, 전원위원장과 1922년 4월 제4대 의장에 선임되어 국채발행, 인구세의 징수, 재정단 조직, 군사선전대와 무관양성 등을 실천하였다. 행정부에서는 재부무 비서국장, 임시공채 관리국장, 재무차장, 학무총장대리차장을 역임하였다. 한편으로 임시정부 지원 외곽단체인 태평양외교연구회, 대한인 거류민단을 조직하였고, 종교인들을 모아 대한야소교진정회, 국제연맹 만국 장로교 연합회도 결성하여 구국 기독교인대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선생은 임시정부 후원단체인 중한호조사 시사책진회, 한국노병회 등을 조직하여 임시정부만이 유일한 한국독립운동의 대표기관임을 강조하고 광복정책을 펴 큰 업적을 이룩하시던 중 격무 과로를 이겨내지 못하고 상해에서 1923년 48세로 순국하였다. 이때 임시정부의 지도자 이동녕, 김구, 이시영, 김규식, 조소앙, 신익희 등이 큰 인재로 평가한 바 있다. 우리정부는 1980년 그에게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유해는 1993년 환국하여 국립현충원 임시정부 묘역에 모셔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의 고향 서천에 유지들의 뜻을 모아 기념비와 상을 세우고 애국과 신앙의 일생을 기리고자 한다. 2004년 3월 일 순국 81주기 국사편찬위원 문학박사 이현희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