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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계몽운동가 송당 김성희(金成喜)는 1847년 8월 14일생으로 부친 김노규(金魯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호적으로는 당초 서천군 종천면 지석리149번지였으나 흥림저수지 조성공사로 수몰되는 관계로 지석리228번지로 이거하였고, 1925년7월21일 사망 후, 장남 김상찬(金商燦)은 판교면 현암리로 전적하고 거주지를 옮겼다. 1893년 교보통상사무아문 주사(9품)의 공직을 시작으로 1895년9월 홍주부 주사를, 경북 관찰부 주사, 1902년부터 다음해 5월까지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정3품)역임하였고, 1907년 1월 한성덕어학교(독일어) 부교관으로, 1907년 5월에는 한성사범학교 교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후 자강회 및 대한협회 회원으로 사회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사회활동하면서 협회월간지에 애국계몽운동에 따른 30여건의 논설을 남겼다. 송당 김성희는 각종 논설을 통하여 당시 시대를 사회진화론적 시각에서 보고, 우승열패, 약육강식의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국권을 상실하여 보호국 상태에 처한 원인은, 외국의 침략 때문만이 아니라 실력양성, 자강실현에 힘쓰지 않는 한국 자체에 있다는 자기반성의 입장에서, 실력의 부족으로 상실된 국권의 회복, 독립의 실현은 실력의 양성, 자강의 실현에서 가능하다는 사회진화론에 바탕을 둔 선자강(先自强) 후독립(後獨立)론을 주장하였다. 아무리 기회가 있더라도 실력이 없으면 성공하지 못하므로 먼저 실력을 양성하여 장차 독립의 기회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였다. 첫째로 교육진흥에 의한 실력양성론 폈다. 국가의 독립은 오직 자강(自强) 여하에 있을 뿐이며 자강의 방법은 국민 교육을 통하여 실력을 쌓고, 산업을 진흥시켜 국가가 부강해져야 한다며 교육자강론을 주장하였다. 학교 교육은 물론 가정교육과 사회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여성교육과 의무교육 및 노동야학의 중요성도 강조하였다. 둘째로 식산흥업(殖産興業)에 의한 실력양성론을 주장하였다. 국권회복은 농공상업의 발달에 있고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민으로 전락된 주요원인은 식산의 부진에 따른 국가의 빈약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셋째로 정치개혁에 의한 실력양성론을 주장하였다. 일제가 한국을 강제병합하여 무단통치로 통제하고 반민주적인 방법으로 인권탄압을 더욱 강화하자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많은 인사가 구속되며 피해가 극심해지자 송당 김성희(金成喜)는 조선총독부에 12가지의 의견서를 만들어 시정해 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출처 : 뉴스서천(http://www.newss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