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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저 평소부터 뜻을 같이 하던 양재흥 김인두 제공들과 상경할 계획으로 있었으나 동월 23일 동지 노형래공이 태극기 제작을 종용하였으르로 쾌히 이에 가담하여 28일까지 7천매를 완성하얐다 익 ㅇ9일 하오 1시부터 마산면 신장리 장터에서 송기면공의 선언문 낭독에 이어 유성열공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 시위에 드러가니 공은 고시상공과 함께 시종 그 선두에 서서 수천군중을 이끌고 인근 각 부락을 돌았다. 이때에 일경이 출동하야 군중에게 연설하던 송여직공 이하 6인을 체포하매 이후로는 군중의 절규가 구속자 구출운동으로 치열화하였다. 경찰출장소를 습격한 후 행렬은 한산읍에까지 이르렀으나 끝내는 피체되어 공주옥에서 2년간 복역후 간신히 출옥하시었다. 기후 위국충정을 오로지 후진양성에 치중하시다가 조국광복을 못 보신 채 1942년 임오 7월 1일 서거하시니 이곳 한산면 송산리 38번지에 계좌로 근봉되시다. 정부에서는 공의 건국공로를 기리며 1977년 12월 13일 대통령표창을 추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