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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휘는 상재요 자는 계호요, 월남은 그의 호이시니 한산이씨 목은선생의 16대손으로 서기 1850년 10월 26일 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서 부친 희택공과 모친 밀양박씨의 맏아드님으로 태어나셨다. 선생은 풍운 짙은 한말에 나시어 한일합방의 국치를 당하시고 날로 악랄해가는 일제의 혹독한 식민지 탄압정책아래에서 오로지 조국광복을 위하여 불굴의 기개와 항상 푸른 젊음과 고매한 인격을 해학과 열변속에 담으시면서 이 민족의 갈길을 인도해주신 이 땅의 거인이시다. 선생은 정치가로서 교육가로서 언론인, 종교가로서 온 생애를 그대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바치셨다. 혼탁과 부패로 어지러운 세태에 강직하신 성품과 뛰어난 역량으로 부정과 불의를 꺽고 외세의존의 고질적 사대풍조를 과감히게 물리치기에 심혈을 기울이셨다. 38세때 주미공관 서기관으로 도미하시어 청국의 온갖 저해를 막고 미국과 국교를 맺어 우리나라 외교사상 처음 있었던 성사를 이룩하셨고 그 뒤로 여러 벼슬을 거쳐 승정원 우부승지겸 경연각참찬의 중임을 맡으시어 정치적인 역량을 발휘하시기도 했으나 옳지 못한 제도나 법령은 설사 그것이 왕명에 의한 것일지라도 끝내 진실을 밝혀 민중의 살길을 열어 놓고야 말으셨다. 일제의 마수가 이 강산을 점점 조여오자 독립협회의 지도자로서 독립운동의 제1선에 몸을 던지시어 군중을 향해서는 대하의 흐름 같은 열변을 토하셨고, 젊은 이들 만나시면 뼈있는 해학으로 그들에게 민족혼을 불어 넣어주셨다. 그러나 그 열변속에는 항상 분울한 심사가 숨어있었고, 해학속에는 언제나 강개한 회포가 서려있었다. 을사국치를 당하자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지도자로서 청년학도들을 인도하여 조직적인 배일 운동을 펴나가셨고 또 조선교육협회를 창립하고 그 회장에 피임되어 청년교육에 힘쓰시며 고령과 노쇠를 돌아보지 않고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하시어 활약하신 업적은 또한 크셨다. 와병중에도 신가회장의 직을 맡으시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두진영이 한데 뭉쳐 공동의 적인 일제와 투쟁하도록 지도하셨고 대다수의 지도자들이 살육을 주장할때 선생은 홀로 비무장을 제창하시어 3.1운동의 방향을 잡아주신일은 인류사상 처음 있었던 달관이었다. 선생은 이땅의 거인이식다. 빈궁이 끝내 그 뜻을 옮기지 못했고 채육이라도 그 지조를 뺏지 못했으며 기개는 하늘처럼 높으셨고 도량은 바다와 같이 넓으시며 신념은 바위처럼 굳으셨고 기백은 송백과 같이 변치않햇으며 그 정신은 한없이 맑으셨고 거치는 항상 분명했으며 태도는 확실하셨고 생활은 지나치리만큼 검소하셨다. 가장 평민적이면서도 진보적인 민중의 선구자이셨다. 1927년 3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