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page


74page

태안지역 동학전래비 우리 태안지역에 동학이 전해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1890년이었다. 지금의 서산시 지곡면 장현리에서 살던 최형순에 의해서였다. 그는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 나라를 건지는 데는 동학이 으뜸이라는 말을 듣고 이에 감화되어 직접 경주로 달려가 제2교조인 해월 최시형 선생을 방문하고 즉석에서 동학에 입도하니 대는 1890년 3월 16일이었다. 최형순은 충청도 전역에 걸쳐 전교할 막중한 밀령을 받고 즉시 고향에 돌아와 우선 서태안지역을 중심으로 전교하니 그 세력이 열화같이 번져나갔다. 그는 훤히 건너다 보이는 이원면 포지리를 건너다니며 전교하자 뜻밖에도 이에 따르는 자가 많아 이에 고무된 최형순은 다시 그 여세를 몰아 갯벌을 건너 원북면 방갈리의 갈머리 마을에 은밀히 전교를 시작했다. 그런데 다른 지역에서 일찍 볼 수 없었던 입교자가 삽시간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퍼져나갔다. 이로써 방갈리를 중심으로 동학의 뿌리를 내리는 토양을 마련하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이렇게 방갈리를 거점으로하여 태안군 전역에 동학의 뿌리가 뻗어 나가 그 세력이 불과 2.3년 동안에 거목으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드디어 1894년 9월 그믐날 자정에 예산본포에서 기포하라는 선타철성이 전타되어 갈머리 마을을 진동하고 있었다. 이때 원북면 방갈리와 이원면 포지리에서 기포한 수 백명의 동학군이 다음날 새벽에 태안 관아를 포위하니 군대 전지역에서 운집한 동학군의 수는 수천에 이르고 있었다. 당시 태안감옥에 투옥되었던 동학의 두목 30여명을 구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뒤 10월 15일 태안, 서산, 해미지역에서 재기포한 수 만명의 동학혁명군은 해미승전곡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맞아 격전 끝에 동학군이 승리하고, 다시 동월 26일의 예산 신례원 전투에서도 동학혁명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동학혁명군도 동월 28일 홍주전투에서는 무력하게도 패전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이렇게 동학혁명은 미완으로 끝이나고 이로 인해 동학인은 물론 그 가족가지도 혹독한 보복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동학혁명 후 80여년 내려오다 제3공화국 대 동학혁명의 순국정신을 재평가 함에 따라 전국 각지에 동학혁명기념탑이 세워지니 우리 태안지역에서도 지난 1978년에 갑오동학혁명군추모탑을 세우고 매년 10월에 사신님의 그 거룩한 애국정신을 기리는 추모대제를 거행함에 있어 비로소 이번에 태안 지역의 동학전래비를 세우는 것이다. 200년(포덕 141) 10월 10일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태안군 지부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