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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양목 선생은, 충남 서산(瑞山, 현 태안) 사람이다. 일찍이 동학에 몸을 담고 있던 중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자 적극 참여하여 반봉건·반침략을 목적으로 혁명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03년 경기도 인천(仁川)에서 서당교사로 활동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던 중 일제의 한국침탈이 노골화되어 가자,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할 목적으로 1905년 하와이 사탕농장 노동자 모집에 응모하여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190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간 그는 1907년 3월 장 경(張景)·백일규(白一圭) 등과 함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를 결성하고 1907년 10월 중앙회장에 선임됨과 동시에 동회 기관지인 대동공보사(大同公報社) 사장 겸 발행인을 겸직하면서 국내외 동포들을 대상으로 국권회복의식을 고취시켰다. 1908년 3월 대한제국 외교고문인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정당화하는 발언과 글을 신문지상을 통해 발표하자, 대동보국회에서는 미주 한인 민족운동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와 합동으로 공동회(共同會)를 개최하여 스티븐스의 망언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였다. 이 때 4인의 총대(總代)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된 그는 스티븐스를 방문하여 그의 발언을 정정 취소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스티븐스가 거절하자 그를 구타하고 돌아와 그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 이튿날 전명운(田明雲)·장인환(張仁煥) 의사가 스티븐스를 처단하자, 양 의사의 재판후원회를 결성하고 판사전권위원으로 임명되어 양 의사의 재판 후원 및 후원경비 조달, 변호사 교섭 등을 담당하면서 공판과정을 '독립재판(獨立裁判)'으로 규정하는 등 재판과정을 통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구미 각국에 널리 인식시켰다. 1908년 7월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박용만(朴容萬)이 한인군사학교(韓人軍事學校)의 설립과 재미한인단체의 통합 논의를 목적으로 개최한 애국동지대표회(愛國同志代表會)를 적극 후원하였으며, 1909년경 박용만이 네브라스카주에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를 설립하자 학생들을 권유·입교시키는 등 사관 양성을 통한 항일무장투쟁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1910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대동신서관(大同新書館)이란 출판사를 설립하고 같은 해 2월 이승만(李承晩)의 『독립정신(獨立精神)』을 출판하여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데 힘을 기울인 그는 동년 2월 10일 대동보국회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 흡수 통합되자 대한인국민회의 총무로 당선되었고, 이듬해인 1911년 2월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에 당선되어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항하기 위해 군인양성운동(軍人養成運動)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독립군 기지 개척과 해외 한인의 통합기관을 조직하기 위해 시베리아와 만주지역에 지방총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또한 1911년 4월에는 박용만이 저술한 『국민개병설(國民皆兵說)』을 출판하였고, 1912년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로 선임되자 그해 6월에 박용만의 『군인수지(軍人須知)』를 발간하는 등 항일무장투쟁에 필요한 민족의식 선도에 앞장을 섰다. 그 후 계속 대한인국민회의 중견 간부로 활동하던 중, 1940년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