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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愛國志士) 이종헌(李鍾憲) 하느님이 보우(保佑)하사이 이 나라를 일제(日帝)의 침략(侵略)에서 건지시기 위해 구국(救國)의 지사(志士)를 1890년(壹千八百九十年) 4월(四月) 9일(九日) 휘(諱) 규삼(圭三)의 장남(長男)으로 낳게 하시니 지사(志士)의 휘(諱)는 종헌(鍾憲) 호(號)는 인제(忍濟) 고려충신(高麗忠臣) 석탄공휘오(石灘公諱存吾)의 후(后)로 지사(志士)는 원래(元來) 충효사상(忠孝思想)이 출중(出衆) 하셔서 동족(同族)과 고난(苦難) 받기를 잠시죄악(暫時罪惡)의 낙(樂)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나라를 위하여 받는 능욕(凌辱)을 일제(日帝)의 모든 보화(寶貨)보다 더 큰 재물(財物)로 여겨 광영학교장(廣英學校長)으로 교육사업(敎育事業)을 통(通)해 국권(國權)을 회복(回復)하기 위해 전념(專念)하고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서산지단(瑞山支團)을 결성(結成)하여 그 단장(團長)이 되어 적극활동(積極活動)하셨다.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은 본단(本團)이 임시정부내(臨時政府內)에 있고 그 지단(支團)은 요지(要地)에 결성(結成)되는 것으로 본지단(本支團)은 한 면(面)에 결성(結成)되었다는 것과 그 활동(活動)이 전군(全郡)에 미친 것과 거액(巨額)의 군자금(軍資金)을 모금(募金)해 임시정부(臨時政府)에서 송금(送金)한 것과 본단사건(本團事件)으로 일경(日警)에 구속(拘束)된 지사(志士)들이 29명(二十九名)에 이른 것은 우리나라 독립운동 사상(獨立運動 史上) 놀랄만한 사실(史實)로 이로인(因)해 이땅은 광복(光復)의 진원지(震源地)가 되엇다. 일제(日帝)도 명치백년사(明治百年史)에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서산지단(瑞山支團)은 일명결사단(一名決死團)이라 했고 단장(團長) 이종헌(李鍾憲)은 단원(團員)과 같이 군내청년(郡內靑年)을 호호방문(戶戶訪問)하여 단원(團員)에 가입(加入)시키고 거액(巨額)의 군자금(軍資金)을 모금(募金)했다고 기록(記錄)하고 있다. 지사(志士)는 일경(日警)에 체포(逮捕)되어 모진 고문(拷問)에도 굴(屈)하지 않으시고 복심법원(覆審法浣) 공판(公判)에 고랑을 찬 손으로 탁자(卓子)를 치시며 이 나라 광복(光復)을 위해 바칠 내 생명(生命)이 하나밖에 없는 것을 심(甚)히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민족정기(民族正氣)를 토로(吐露)해 그들의 간담(肝膽)을 서늘케했다. 검사(檢事)는 피고(被告)의 법정(法廷)을 모독하는 언행(言行)으로 보아 능(能)히 협추공갈(脅追恐喝)로 독립획책(獨立劃策)했음이 분명(分明)하다고 징역(懲役) 9년(九年)을 구형(求刑) 했고 형사(刑事)는 징역(懲役) 4년(四年)을 언도(言渡)해 형기(刑期)를 마치고 계속 광복(光復)을 위해 힘쓰시다가 1957년(一九五七年) 6월(六月) 18일(十八日) 67세(六十七歲)로 별세(別世)하셨다. 1977년(一九七七年) 12월(十二月) 23일(二十三日) 대한독립(大韓獨立) 유공자(有功者)로 대통령(大統領)의 추서훈(追叙勲)이 내리시니 지사(志士)의 애국(愛國)의 보람이요 안면(安眠) 영광(榮光)이라 지사(志士)는 동지(同志)를 사랑함이 극진(極眞)하셨고 오몽근 지사(吳夢根 志士) 가재창 지사(買在昌 志士) 김정진 지사(金廷鎭 志士) 염성환 지사(廉星煥 志士) 등(等)의 애국공적(愛國功績)을 높이 찬양(讃讃)했고 이를 현창(顯彰)해 드릴 것을 자제(子弟)들에게 늘 당부하셨다. 이번에 반도청년회(半島靑年會)가 중심(中心)이 되어 추모비(追慕碑)를 세우기로 하고 성엄(誠奄)에 청문(請文)하거늘 불초천학(不肖淺學) 몇마디를 감(敢)히 써 지사(志士)의 애국심(愛國心)으로 이땅의 영원(永遠)한 행복(幸福)을 도영(導迎)하는 등(燈)불이 되기를 원(願)한다. 전 성균관 사성남평후학(前 成均館 司成南平後學) 문원(文元) 모근찬(模謹撰) 취당(翠堂) 이종원 서(李鍾元 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