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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세에 탁월하여 적곡명진(寂谷名振) 하더니 20세의 나이로 대한독립을 갈망하다가 갈현리 주민들을 모아놓고 김옥제 등과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대한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외치며 독립만세를 고창할 것을 제안하고 다같이 성왕산에 올라 울분을 토하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으니 때는 1919년 4월 8일이라 공께서는 만세운동에 참여한 지사들 중 20세의 가장 어린나이로 내나라 내 국가의 독립을 갈망하며 살아서는 설곳이 없고 죽어서는 묻힐 땅도없다. 이 원수를 갚지않고 어찌할고! 각인은 동심일체 힘을 다하여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를 갚아 내 나라를 독립하자! 만세를 고창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태90도를 받고 모진 고통과 시련속에서 생활하시던 중에 1921년에 부인 전주이씨와 결혼 1932년에 부석면 칠전리로 이사하시어 슬하에 3남 3녀를 두시고 생활하시다 1971년 6월 20일 당년 72세로 의로운 생을 다하셨다.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2010년 3월 1일자로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과 동년 4월 21일자로 국가유공자 증서까지 추서되어 그의 높은 공적을 기리기 위해 부석면민의 이름으로 이 비를 세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