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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때의 횃불시위가 얼마나 격렬하였던지 이를 진압하던 왜경의 총격에 2명이 즉사하였고 이후로 보현산이 자연스럽게 만세봉으로 불리위게 되었다. 이봉하 선생은 이 횃불 독립만세의 선구자로서 허낙득 선생(25세)과 같이 왜경에 체포되어 1개월여의 모진 고문으로 고막이 터져 귀가 먹었고 손에 칼을 맞아 상처를 입는 등 갖은 고초를 당하셨으나 과묵하고 강철같은 의지로 그 뜻을 굽히지 아니하였다. 1919년 5월 19일에 보안법 안녕 질서방해죄로 6개월의 형을 받아 공주교도소에서 복역하였다. 체포되어 갈 때에는 마을주민에 앞장서서 주도하는 혈기왕성한 청년이었으나 1919년 11월 20일 6개월 여 만에 출소하여 집으로 돌아왔을때는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으며 1919년 부석면 취평리로 이주한 이봉하 선생은 장순여사와 결혼하여 8남매를 두고 살았으나 독립만세운동으로 인하여 가정이 어려워지고 생계를 지탱하기가 힘들었다. 또한 선생의 과묵한 성격은 해방된 후에도 자녀와 이웃에게도 독립만세운동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1971년(78세)의 일기로 한많은 세상을 접고 말았다. 선생의 후손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대쪽같은 선생의 사연은 이 세상의 역사 속으로 사라질뻔하였으나 허낙득 선생 후손 지촌 허룡의 노력으로 이봉하 선생의 의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