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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수린 자는 옥린 관향은 여양이고 시조 공 여양군 총후 29대손으로 고 휘 세기 비 청주 곽씨 장남으로 서기 1898년 12월 21일 출생하니 성장하며 예절이 바르고 재능이 출중하여 신창보통학교 4년 우등으로 졸업 가세가 빈한하여 고생이 심하였다. 평산 신씨를 배우로 맞이한 공은 주경야독하여 21세에 아산 금융조합에 공채되니 필적이 뛰어나고 정직 근면하여 상사 신임이 커 조합 금고 관리를 담당 근무하여 오던 중 1921년 4월 4일 24세때 공은 사생활에 안주함은 나라 잃은 백성의 도리가 아님을 절감하고 조국광복에 신명을 바치기로 결심 양친과 처자를 뒤로 하고 선배 동지인 사촌 매형 최익수와 이종락 독립투사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망명 이때 공은 조합공금을 가져다 임정 군자금으로 헌납하였다. 공은 임시정부 재산 서기로 임명되어 광동 무창서 활동 1923년부터 5년간은 북경 광동 무창 한인독립청년회 대표로 활약 1927년 11월에는 상해 불조계 상현당서 재중국본부 한인청년동맹을 결성 조선독립운동 비밀결사대를 창립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 중 1928년 12월 군자금 모금 임무를 띠고 이국으로 밀입국 중 애석하게도 왜경에게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고 공주지방법원서 재판을 받았는바 조선독립과 세계평화를 위하여 일제 覊絆(기반)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 왜 판검사의 사상 전향 설득을 일축하여 많은 방청객을 감동케 했다. 1929년 7월 23일 공은 소위 치안유지법 1조 위반으로 5년 구형에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공주형무소서 복역 중 갖은 학대를 받아 급기야 중병으로 사경에 이르자 1930년 8월 병보석으로 가출옥 온양 영천병원에 입원 가료하였으나 쾌유를 기원하는 가족 친지의 정성도 보람없이 동년 9월 10일 33세를 일기로 짧고 파란 많은 생애를 마치니 많은 사람이 독립투사 공의 서거를 애도하였다. 1992년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73주년 기념일을 맞아 대통령은 공의 건국에 기여한 공적이 지대함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고 이를 높이 치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