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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성 의병전쟁은 우리나라 의병전쟁사의 서막을 장식한 매우 극렬한 전투로 기록되어진다. 홍주성 의병들은 끝까지 용전분투하였으나 낙후된 병기로는 적국의 신식무기와 화력에 불가항력일 수밖에 없었다. 열흘간의 밀고 밀리는 접전 끝에 5월 3일 적의 총공세에 맞선 의병진의 사활을 건 백병전은 의병들의 거룩한 투혼으로 점철된 혈전이었다. 신식무기로 무장한 적의 대공세로 인해 결국 홍주성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함락되었으며 곽한일 의병장은 극적으로 탈주에 성공 전라도 순창에 있던 최익현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부대에 합류하고자 하였으나 역시 이미 패퇴한 뒤였기에 독자적으로 거사 계획을 추진하게 된다. 같은 해 9월 김덕진 김운탁 박윤식 이남규 정재호 등과 협의해 거듭 의병을 일으켜 참모로 임명되시다. 이어 수백 명의 군사를 예산읍에 배치하고 다음 달 5일 총공격을 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사전에 거사계획이 발각되는 바람에 의병장 민종식과 함께 체포되시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무기징역형을 받고 수감 옥고를 치르시다가 1907년 7월 종신유배형으로 감형 전남 신안군의 작은 섬 지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시던 중 고종황제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나셨다. 그러나 점점 비찬에 빠져가는 국운에 통한의 눈물을 삼키시며 분기(奮起)할 날만을 기다리시는데 고종황제께서 극비리에 검과 의대조(衣帶詔:허리띠에 감춰 내려진 밀지)를 내리시고 전라도의 임병찬 의병장과 함께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게 되시어 1913년 2월 부터 총무총장으로 활약하시게 된다. 이후 전국적 규모의 국권회복운동의 방향을 모색하시며 전국을 잠행 의군부원 모집과 군자금모금을 주도하시며 전국 조직을 마치고 거사의 그 날을 기다리다가 전모가 발각되어 대봉기의 꿈이 좌초되시니 이른바 독립의군부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셨다.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셨다. 출옥 후에도 존양토복(尊攘討復:왕실을 받들고 오랑캐를 물리쳐 나라를 되찾음)의 간절한 꿈을 접지 못하시매 계속하여 독립투쟁을 암암리에 전개하시다가 1914년 또 다시 발각되어 외딴섬 유배생활로 인고의 세월을 보내셨다. 1916년에 종신집행유예로 아산 송악으로 돌아오시니 조국독립을 강렬한 집념을 불태우시다가 큰 뜻을 못 이루시고 1936년 3월 21일 타계하시기까지 일본경찰의 표적 같은 감시를 받으셨다. 그러나 생전에 이루셨던 독립의군부의 전국적 조직과 투쟁의식은 기미년 3.1만세운동으로 온 겨레의 대대적인 봉기를 가능케 하였으니 님의 드높은 뜻이 결코 무산되지 않았음이라.. 이에 대한민국 정부는 님의 독립운동에 바친 고귀한 뜻을 받들어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고 전투시에 사용하시던 장검은 서울 서대문독립공원과 천안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있다. 애국지사 곽한일 의병장은 이처럼 나라사랑과 겨레사랑의 선구자이셨다. 고매하신 학문으로 민중을 교화하였으며 일본의 국권침탈 앞에 장검을 들어 바람처럼 잠행하시어 동지를 모으시고 투쟁하셨다. 수차례 체포되시어 불꽃 같은 강인함으로 옥고를 이겨내시니 아산인의 자랑이자 민족정기의 모범이시다. 후대의 우리들은 님의 유지를 받들어 경외(敬畏)하며 님의 거룩한 족적(足跡)을 기리고 칭송하여 이 터전 뒤에 길이 새겨 남기리라. 서기 2005년 10월 글 : 곽노홍 극작가 한성디지털대학교수 수비 : 곽한일 의병장 송덕비 건립 추진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