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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한일(1869년~1936년, 조선 말기의 의병장) 의병장 곽한일은 이 고장 출신으로 1895년 일본의 낭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불에 태우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나라의 모든 국민이 깊은 슬픔에 잠겼다. 이에 학문에 정진하던 유림들이 붓 대신 칼을 들어 일본의 무력에 대항하는 의병전쟁을 일으켰다. 곽한일은 화서학파의 문인으로 면암 최익현의 제자였다. 1906년 봄에 홍주의병에 가담하여 홍주성 공격에 크게 활약하였다. 홍주성이 일본군에 합락되자, 피신하며 재거의를 도모하던 중 일진회의 밀고로 붙잡혀 1907년 7월 종신유배형을 언도받았다. 서대문감옥에 투옥된 뒤 다시 전라남도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가 1912년에 풀려났다. 1913년 고종의 밀명으로 독립의군부 총무총장에 임명되어 전국적 규모의 의병전쟁을 계획하며 동지의 규합과 군자금 모금에 힘쓰다가 1914년에 붙잡혀 옥고를 치른 뒤 특사로 풀려났으나 가택 연금되어 일본 경찰들의 매서운 감시를 받다가 1936년 별세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며 의병전쟁 당시에 사용하던 도검이 서대문독립공원 역사관과 천안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