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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시 송악면 역촌리 75-1 외암마을 애국지사 곽한일 의병장 송덕비를 찾아왔다. 곽한일은 아산(牙山) 출신으로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문인이며, 당시 서세동점(西勢東漸)과 일인의 국정간섭으로 국운이 날로 쇠하여 가는 것을 항시 근심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1906년 2월 남규진(南圭振)과 더불어 면암을 뵙고 지도 해 줄 것을 청하였다. 면암은 곽한일에게, "호서(湖西)의 일은 내가 그대에게 의탁하는 것이니 그대는 남규진과 함께 대중을 격려하여 하루 속히 군사를 일으켜 영 호(嶺湖)와 더불어 기각( 角)의 형세를 만들도록 하여라. 만약 일이 뜻과 같지 않으면 남으로 내려와 나와 함께 일을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리고 도장을 새겨 주어서 사방에 호소하고 군중에게 명령할 때에 쓰는 병부로 삼게 해 주었다. 즉 곽한일이 하는 일은 면암의 명을 받아서 수행하는 것이라는 권위를 부여받게 된 것이다. 아울러 격문과 존양 토복(尊攘討復)의 기호를 곽한일과 남규진에게 주어 스스로 나아가 거사토록 하였다. 윤 4월 초 5일(양 5월 27일) 남규진으로 하여금 예산(禮山)에서 기병하게 하고 자신은 4백여 명의 병사를 인솔하고 해미성(海美城)을 점거하려다가 전 참판인 민종식(閔宗植) 의진이 홍주성(洪州城)에서 적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함께 홍주로 진군하였다. 일찍이 민종식은 4월 18일 충청도 홍산 지치(鴻山支峙)에서 창의(倡義)의 깃발을 올려 행군하여 서천(舒川)을 거쳐 남포(藍浦)를 지나 4월 26일 진격하여 홍주성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때 곽한일은 남계원(南啓元) 안병림(安炳琳)과 함께 돌격장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적군의 대병력이 홍주 일대에 집결하자 민종식은 위기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시기에 윤 4월 7일 예산 지방으로부터 곽한일과 남규진이 의병부대를 이끌고 합세해 들어오니 홍주 위진의 전세는 날로 치솟았다. 한편으로 주민들을 동원하여 성첩을 수축하기도 하고 작전 부서를 일부 개편하여 전력을 확충시켰다. 곽한일은 다시 소모장(召募將)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윤 4월 9일(양 5월 31일) 적의 대공세로 홍주성이 함락되고 일부 인사들은 성을 탈출하여 재기를 계획하는 데 심혈을 경주하였다. 홍주성 함락 후, 곽한일은 최익현의 순창(淳昌) 의진을 따르고자 하였으나, 이미 면암 의진도 패하여 13인의 의사들이 모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였다. 그는 독자적인 거사 계획을 할 수밖에 없었다. 9월 보름 경 충남 예산 지방을 중심으로 의사들의 거사 준비 모임이 자주 있게 되고 점차 계획이 무르익어 갔다. 특히 예산읍에서 북쪽으로 10리 거리에 있는 한곡(閑谷, 지금의 大述面 上項里)에 살고 있는 이용규(李容珪)의 족형인 전 참판 이남규(李南珪)의 집에서 곽한일을 비롯하여 김덕진(金德鎭) 이용규(李容珪) 박윤식(朴潤植) 김운락(金雲洛) 황영수(黃英秀) 정회규(鄭會圭) 박창로(朴昌魯) 이만식(李晩植) 등 수십 명이 협의하여 다시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이 때 민종식을 대장으로 추대하기로 하고 황영수 정재호(鄭在鎬)를 중군장으로, 박윤식을 운량관(運糧官)으로 곽한일과 이용규 김덕진은 참모로 임명되었다. 9월 그믐 경에는 수백 명의 건장한 군사들을 예산읍 일대에 배치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10월 5일(양 11월 20일)을 기해 예산읍을 총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은신하고 있던 민종식 역시 이남규의 보호 하에 근처에 초치해 두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한곡 근처에 있던 일진회원에 의해 기밀이 누설되어 거사 계획의 일부가 일본헌병대에 알려졌다. 10월 2일 새벽 적의 기습을 받고 곽한일을 비롯하여 이남규 부자, 박윤식, 이용규, 이석낙(李錫樂) 등이 체포되었으며, 뒤이어 민종식 김덕진 성우영(成佑永) 등도 모두 체포되었다. 이로써 천신만고 끝에 마련되었던 의거 준비는 다시 좌절되고 말았다. 이들은 모두 공주(公州) 경무청으로 압송되었다가 경성 평리원(京城平理院)으로 이감되어 문초를 받았다. 이듬해 7월 민종식은 사형에서 감1등하여 전라도 진도(珍島)로 유배되고 곽한일을 비롯하여 김덕진 이용규 황영수 박윤식 박두표(朴斗杓) 등은 지도(智島)로 종신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사면되어 귀향한 후 1913년 2월(양)에는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의 총무총장(總務總長)에 임명되어 재정 지원을 약속하였다. 독립의군부는 고종의 밀조(密詔)에 의해 1912년 10월에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이다. 전라남북도 순무대장(巡撫大將)에 임명된 임병찬이 그의 아들 응철(應喆)을 서울로 파견하여 전 참판 이인순(李寅淳) 이명상(李明翔) 곽한일(郭漢一) 전용규(全鎔圭)와 국권회복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독립의군부 정의(正意)를 제정하고, 총무 참모 회계 사법 군무(軍務) 등 조직을 구성하였으며, 맹원 모집(盟員募集)과 군자금 조달에 분주하였다. 이 때 곽한일은 이인순(李寅淳)으로부터 김재순(金在珣)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김재순을 대면하게 된 자리에서 그의 여비와 운동자금을 조달해 줄 것을 약속하였다. 그 조달을 위하여 동지인 전용규·이정로(李鼎魯)와 협의한 후 온양군 일북면 덕지(溫陽郡 一北面 德地)에 사는 윤천보(尹天普)·윤익동(尹翼同)과 평택군 서면 목정리(平澤郡 西面 木井里)에 사는 이일영(李一榮)·윤상보(尹尙普)·강태봉(姜泰逢) 등으로 하여금 모금운동을 전개하도록 명했다. 이들은 전라남북도·충청남북도·경기도 등지에서 3백원을 거두어서 3월 하순경에 김재순에게 출급(出給)하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경비를 조달할 것을 보장해 주었다. 이것이 세칭 독립의군부사건 혹은 온양사건이라 불리운 운동의 전모이다. 1913년 음 3월 곽한일은 전용규(田容圭)와 함께 김재성(金在性)에게 "방금 민권을 단합하기 위하여 창덕궁(昌德宮)에서 칙명을 발포하였는데 준수한 사람에게 칙명을 하송하니 경북 문경군의 최욱영(崔旭永)에게 그 칙명을 전해달라."고 명하여서, 김재성이 최욱영에게 칙명을 전하게 하였다. 1913년 8월 13일 이른바 "독립의군부사건"이 발각되어서 김재순에게 동조한 곽한일·전용규·이정로 등 독립의군부 맹원에게 각각 1년 6개월의 징역이 언도되고, 김재순은 징역 2년의 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출옥 후에도 계속하여 맹원들을 모집하고 군자금 모집에 주력하였다. 1914년에 이 일이 다시 발각되어서 유배되었다가 1916년에 종신집행유예(終身執行猶豫)로 바뀌어 별세할 때까지 일경의 감시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