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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 무인멸왜운동 기념탑 1910년 한일합방후 나라 잃은 서러움을 한탄하고 일찍부터 천도교 제3세 교주 손병희선생의 가르침을 받아온 규암 정규희(이명: 수길)선생은 지역의 최병수, 임천군(일면 화철), 서몽조, 오상근선생과 더불어 항일 구국투쟁에 동참할 기회를 기다렸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의 독립만세가 전국 각지로 확산되자 선생들은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모의하고 4월 4일 선장장터를 택하여 군중으로 하여금 독립만세 시위를 하도록 하는 한편 정규희선생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동지들과 같이 헌병주재소(현재 선창지서자리)에 돌을 던지고 유리창과 집기를 부수면서 조선의 자주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최병수 선생은 최선두에 서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본헌병이 쏜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35세를 일기로 장열하게 순국하셨다. 시외를 주도한 선생들은 일본헌병에 체포되어 잔인무도한 고문과 수모와 치욕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항거하자 일제는 공주형무소로 이감했으며 동년 5월 12일 공주지방법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및 소요죄로 정규희, 서몽조, 임천근, 오상근선생에 대하여 징역 2년 6월을 각각 선고하였다. 이에 정규희선생등은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니 같은해 9월 1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혹독한 옥고를 치르고 형기만료로 출옥하셨다. 우리정부에서는 1963년 3월 1일 최병수선생께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고 1990년 12월 26일 정규희, 임천곤, 서봉조, 오상근선생께는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또한 1934년 8월 16일 천도교 제4세 교주 박인호선생은 멸왜기도와 독립운동을 하라고 밀령을 내렸으며, 제2차로 1936년 8월 14일 천도교 두목들에게 다음과 같은 밀령을 다시 내렸다. "개 같은 왜적놈을 하늘님께 조화받아 일야간에 멸하고 전지무궁하여 놓고 대보단에 맹서하여 한이원수까지 갚아 완전 자주독립하겠습니다"라고 심고와 조석으로 특별기도를 하고 독립자금을 모금하라고 했다. 이 사건이 1938년 2월 17일에 황해도 신천에서 조선인 왜경 고등계형사에 발각되고 전국적으로 검거 선풍이 일어나 수백명이 체포되고 장독으로 사망한 사람이 속출했다. 선장, 둔포, 온향, 신창등 우리지역에서도 6명이 무인멸왜운동으로 체포당하여 7~13일간의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는것은 그 의미가 대한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이 멸왜운동이 제2의 3.1운동으로 발전하여 중일전쟁의 수행에 차질이 있을까 우려해서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도록 철저히 봉쇄했으며 재판과 행형마저 포기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일제가 정신적으로 패망했음을 자인한것이다. 7년후 8.15해방으로 그 결과가 확실하게 드러났다. 이렇듯 무인년(1938년)의 멸왜운동은 조선사람 거의 모두가 독립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황국신민화가 되었다고 딛었던 일제에게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고, 반면에 우리 민족사에 불굴의 민족정신이 살아있음을 입중하는 값진 대사건이었다. 이와같은 선장면은 삼봉산에 올라 봉화를 올리면서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혀 외쳤고, 각 면은 면대로 산에 올라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선장에서 116인, 아산시에서도 도합 206인이 옥고와 태형 40~90도를 맞는등 쓰라린 고통을 받으면서 5천면의 유구한 민족역사와 국권을 지키기 위하여 분연히 궐기했던 것이다. 아산시 선장면지역발전협의회 그리고 유지제현은 우리지방이 타지방에 비교할 수 없이 애국의지와 충절의 "혼"이 대단함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후손에게 이 "혼"을 영원히 전해주기위하여 다같이 뜻을 모아 뒤늦게마나 독립호국영령를 추모바흔 이 탑을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