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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각지에서 독립시위운동이 전개되자 이에 호응하여 김천봉 서몽조 임천근 오상근 등과 모의하고 동년 4월 4일 선장면 군덕리 선장시일을 택하여 2백여 명의 군중으로 하여금 독립 시위운동에 가담토록 주도하여 대한민국만세를 절규하고 주동한 동지들과 같이 곤봉을 휘두루며 군중을 지휘 선장면 헌병주재소에 살도하여 투석전을 전개하고 구내에 침입 유리 창 등을 파괴하는 등 일제의 치안을 방해하다. 공은 주모한 동지들과 같이 일병에 체포되어 극악무도한 고문과 치욕 속에도 뜻을 굽히지 않으시다. 공주형무소로 이감되었으며 동년 5월 12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고 이에 불복 항소하였으나 동년 9월 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쓰라린 옥고에 시달려 신병으로 고생하다 형기 만료로 출옥하다. 공은 감시를 당하면서도 1938년 천도교 멸왜기도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왜경에 피검 온양경찰서에 구금되어 혹독한 고문으로 신병을 얻고 13일만에 출감되어 40여일간 가료를 받었으며 그 후 왜경의 간악한 감시로 인하여 구국의 웅지를 펴보지도 못하고 8.15 해방을 맞이하다. 공은 숭고한 애국정신을 발휘하여 조국의 자주독립운동에 헌신하였음에도 이를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정부의 포상을 사양하였으며 천도교의 기본사상으로 조국의 평화통일만을 염원하다. 1979년 5월 23일 향년 85세를 일기로 한 많은 형극의 생애를 마치고 이곳 아산군 선장면 군덕리 산 38번지에 배위 안성이씨와 합장하여 모시다. 공의 항일투쟁은 조국광복의 저력이 되였으며 공이 남기신 거룩한 애국의 얼은 민족정기의 정화요. 인류정의의 구현이라 할 겄이다. 이에 정부에서는 1980년 8월 14일 대한민국 헌법에 의하여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이를 높이 추앙하고 후세에 영원히 빛내기 위하여 여기에 이 비석을 세우다. 서기 1983년 5월 13일 아산군수 정필모 수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