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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규선생 순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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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 이남규선생 순절의 땅. 수당 이남규선생은 1855년 11월 3일 서울 미동에서 태어났으며, 향리는 예산이다. 1875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승문권권지부정자를 거쳐 형조참의, 영흥부사, 안동관찰사등을 역임하다가 을미사변후 향리인 예산으로 내려와 상소를 통한 반일운동을 전개했다. 그의 반일 활동은 상소운동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1893년 입도왜병축소를 올렸다. 1894년 일본공사 대도규개가 군사를 이끌고 입성하자, 청절왜소를 올렸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에 이어 폐후조칙이 발표되자, 당시 영흥부사를 지내고 있던 이남규는 청복황후위호토적복수소를 올렸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청군신상배성일전소를 올린 뒤 깨끗히 처신할 것을 결심하고 두문 불출하였다. 1906년 민종식의 홍주의진 선봉장에 임명되었으나 홍주성에 입성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홍주의진이 크게 패하자 민종식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선생의 집을 중심으로 홍주탈환작전 본부가 형성되어 1906년 10월 5일 거사할 준비가 갖추어졌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1907년 8월 19일 일경에 체포 압송도중 온양 외암촌 냇가에 이르러 아들 충구, 교노 김을길과 함께 저들의 칼에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