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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현 공북정에 관한 기문(新昌縣拱北亭記) 무송(茂松) 윤상국(尹相國)이 거정에게 말하기를, "신창 수령 조군유(趙君愉)가 새로 정자를 짓고 '공북(拱北)'이라 편액을 걸고 기문을 청해 왔는데, 한마디 해주기 바랍니다." 하였다. 내가 생각을 더듬어 보건대, 병자년(1456, 세조2) 여름에 서원(西原)에서 공성(公城)으로 가는 길에 이른바 신창 이라는 곳을 들렀는데, 동년(同年)인 태수 김률(金慄)이 길에 마중을 나왔다. 마침 날이 매우 더워서 잠시 나무 그늘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중에 고을을 다스리는 책략을 물었더니, 김률이 말하기를, "이 고을은 땅이 좁고 사람이 적으며 토지가 척박하고 생산이 적은데, 아전은 교활하고 완악하며 백성은 어리석고 분쟁이 심합니다. 나는 복잡하게 얽힌 일을 처리하는 재주가 없으니, 단지 소란스럽지 않게만 할 뿐입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옛 사람이 이르기를, '작은 고을을 다스리는 일은 생선을 찌듯이 해야 한다.'라고 했으니, 그대는 고을을 다스리는 일에 거의 핵심을 알고 있습니다. 만일 그대의 후임자가 그대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그대와 같은 정치를 한다면 대체 다스려지지 않을 고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갈 길이 바빠서 마침내 작별하고 떠났었다. 그 몇 해 뒤에 호남으로 가는 길에 이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태수 윤사문호(尹斯文壕)가 길에서 나를 맞아 술잔을 나누었다. 그 젗이하는 것에 대해 물었더니, 우리 김 동년과 같았다. 또 내가 갈 길이 바빠 두루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거정이 이 고을과는 천생의 인연이 없어서 그러한 것이 아닐까 하고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저번에 들으니, 조후(趙候)가 부지런하고 민첩하여 간소하고 요약되게 정치를 하고 번거롭게 명령하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백성들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으며, 백성들에게 서둘지 말라고 했는데도 백성들이 즐거이 일터로 달려와 관청과 정자가 훌륭하게 일신되었다고 하였다. 내가 그 사람을 생각하고 그 정치를 사모하면서도 그 고을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니, 김동년과 윤사문과 예전에 상의했던 말들이 항상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이제 조후가 정자를 짓고 무송이 기문을 부탁하는데, 그 대상으로 유독 나를 선택하여 지으라 하니, 이는 이전에 하늘이 나에게 두 번이나 인색하게 굴었던 것이 바로 오늘을 기다리게 한 것이라 하겠다. 감히 즐거운 마음으로 기문을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생각하건대, 누각을 짓는 것은 그저 즐기며 놀기 위해서가 아니라 군주가 보낸 사신을 높이고 빈객을 접대하여 그들의 답답한 마음을 풀어 주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 이름을 '공북'이라 했고 보면, 단지 여기에서만 그치는 것이아니다. 여기에 올라 조망하거나 여기에서 술을 마시고 시를 읊는 자들이 멀리 대궐 쪽을 바라보면서 서울이 북쪽 하늘을 가리키며 밥 한 끼 먹는 사이에도 항시 임금을 잊지 않는다면, 왕실을 존숭하는 〈춘추〉의 의리를 깊이 지니게 될 것이다. 대저 〈춘추〉는 선을 포상하고 악을 폄하한 책이다. 왕실을 높였으면 기록했고 백성의 일을 중시했으면 기록했다.조후의 이번 거조는, 일을 함에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도 않았고 시절에 비추어 호사스럽게 하지도 않았으며, 또 왕실을 존숭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춘추〉의 사례로 볼 때에 마땅히 크게 특별히 적어서 찬미해야 할 일이다. 내가 외람되이 문한(文翰)의 직임을 맡고 있으니, 쓰고 싶지 않더라도 안 쓸 수가 있으랴. 산천과 고을의 형세와 경관 같은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어찌 꾸며 칭찬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겠는가. 나는 척박한 밭 한 뙈기가 평택(平澤)에 있으니, 뒷날 만일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가서 노년에 보내게 된다면, 그 정자에 한번 가서 그에 대한 내 말을 마무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