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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현 관아 및 경관에 대한 기록(新昌縣 歷史) ● 조선왕조실록 성종 139권, 13년 - 이조에서 신창현 사람 표간 등의 상언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신창현이 비록 중궁의 내외향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중궁이〉 탄생한 곳입니다. 청컨대 군으로 승격시켜 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중종 66권, 24년 - 충청도 이산현에서는 지진이 발생했고, 신창현에서는 우레가 울렸고, 온양군에서는 우레 같기도 하고 지진 같기도 한 소리가 나서 인마가 놀랐다. 숙종 35권, 27년 - 충청도 신창현에 해일이 일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동쪽으로는 온양군 경계까지 10리이고, 북쪽으로는 아산현 경계까지 14리이고, 서쪽으로는 면천군 경계까지 26리이고, 남쪽으로는 예산현 경계까지 21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5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굴직현(屈直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기량(祁梁)으로 고쳐 탕정군(湯井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 9년에 다시 천안부(天安府)로 이속시켰다. 공양왕 3년에 본현에 성을 쌓고서 당성(溏城)이라 이름하고, 부근 주현(州縣)의 조세(租稅)를 여기에 수납해 두고는 이를 해상으로 서울로 수송하였으므로 비로소 만호 겸 감무(萬戶兼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조 원년에 만호는 감생(減省)하고, 태종 14년에 온수(溫水)와 병합하고 읍호를 온창(溫昌)이라 하였다가 16년에 다시 나누어 다른 예와 같이 현감으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