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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에 가입 경동지부장이 되었고 선교와 육영에 힘쓰면서 일제와 싸워 누차 옥고를 격꼈다. 1945년 8.15해방후는 정치활동에 주력하니 대한민족 대표자회의 대의원으로 건국사업에 초대 대통령 이승만박사와 합작하였고, 향리 아산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여 국회문교분과위원장에 임하고, 대한국민당 최고위원, 애국동지원호회장, 건국대학 명예학장, 한중협회장등 공직을 띠고 다방면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을 수하고 말년까지 민주공화당 총재고문등 부단히 사회활동에 참여하시다가 1970년 3월 20일 장서하시니 향년이 83이시다. 선생의 초배 전주이씨는 시종 춘식의 녀로 장남 민철을 생하고 속배 김해김씨 엘라여사는 기독교 전도사 락권의 녀로 차남 민광, 3남 민휘를 생하다. 민철의 자는 신영, 남영, 문영이요 미광의 자는 수영이요 민휘의 자는 일영, 원영이다. 선생의 부음이 전하자 국가원수를 비롯하여 각계인사의 공론으로 선생의 전에 국가민족에게 봉사한 공로에 보하기위하야 사회장으로 결정하니 이는 실로 국민여론을 반영한것으로서 장례위원장은 전대통령 윤보선, 33인의 1인인 이갑성공을 비롯하여 삼정수뇌, 종교 문화 교육 언론 여야정당 실업계등 각계 대표인사 700여명이오 영결식은 7일장인 3월 26일 장례위원장인 곽상훈 전국회의장의 사식으로 기독교 감리교 변홍규감독의 주례로서 서울 종남산 중복에 자리잡은 숭의여자고등학교정에서 국군악대의 조곡과 수 많은 시민과 학생들의 봉도하는 가운데 엄수되고 당일 고향 아산으로 운과도중 온양역전에서 아산군민의 제사를 받었고 선산인 월선리 응봉산 중복 선좌 걸향에 안장하다. 충무공을 정점으로 하는 5세 7충의 전통적 충의정신은 광복후 독립운동 유공자로써 건국공로훈장을 받은분이 일문중에 7인이 되고 이 7인중에는 선생과 선생의 초배인 전주이씨가 포함되었으니 타에 예를 볽수 없는 놀나운 사실로써 만인의 담배를 받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