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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 선장 4.4 독립만세운동사 우리 고장은 마치 신선의 손과 같다 하여 선장면(仙掌面)이라 이름하였다. 삼봉산의 푸른 요람이라 하여 삼봉청람(三峰靑濫)인 선장8경 아래 선장면 소재지가 소들강문 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평화로이 자리하고 있다. 옛날의 선장은 곡식과 소금을 인천과 서울로 운반하는 포구였으며 이로 인해 물류가 활발하고 세상의 소식이 빠르게 전해지는 곳이었다. 1910년에 국권을 침탈당한 뒤 나라를 되찾고자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이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1919년 기미년 독립만세운동도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선장 지역 만세운동은 정수길(규희)이 주도하였다. 동학농민혁명군 신창 접장 정태영의 아들인 그는 1907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신창의 사립 신민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으며 손병희 선생의 수제자 중 한명이었다. 정수길(군덕리)은 임천근(군덕리), 서몽조(돈포리), 오상근(돈포리), 김천봉(인주 도흥리) 등 지사들과 독립만세운동을 결의하고 선장면 각 마을 주민들이 적극 참여하도록 규합하였다. 선장과 함께 동학의 교세가 강했던 도고면 각 마을 주민들도 이 거사에 함께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4월 4일 선장 장터에서 수백 명이 참가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정수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지사들과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참가자들은 다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윽고 주동자들은 몽둥이를 들고 앞장서서 시위대를 이끌며 주재소로 몰려갔다. 일본 헌병조장 장사손삼랑이 공포탄을 쏘며 해산을 강요하였으나 시위대가 더욱 격렬하게 돌진하자 경찰은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앞장서서 맹렬히 독립만세를 외치던 최병수 열사는 총에 맞아 순국하였고 7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시위대도 해산되었다. 이날의 격렬한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정수길, 임천근, 서몽조, 오상근, 김천봉 등 5명이 일제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들은 모두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징역 2년6월을 선고받았다. 정수길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공주형무소로 이감되었고 임천근, 서몽조, 오상근, 김천봉 등은 공주형무소에서 고초를 겪었다. 모두 형기 만료로 출옥하였다. 이외에 선장면의 적극 참여자 110명 중 52명은 태형 6도, 57명은 태형 40도를 맞았고 고령인 1명은 벌금 10엔을 처분받았다. 도고면의 적극 가담자 80명도 태형을 당하였다. 이후에도 정수길은 1926년 6.10만세 운동과 927년 신간회 운동에 참여하였고, 1938년 멸왜기도운동과 독립운동자금 모금활동이 발각되어 온양경찰서에서 13일 간 옥고를 치렀다. 이러한 선장면 독립만세운동의 숭고한 공적을 기리며 대한민국 정부는 최병수 열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1963년)을 추서하였다. 또한 1990년에 정수길, 임천근, 서몽조, 2007년 김천봉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2017년 선장면 소재지 종합정비사업으로 이곳에 현충시설을 설치하고 선장 4.4독립만세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뜻을 길이 남기고자 이 기념비를 세우다. 2017년 12월 31일 / 세운이. 아산시장 복기왕, 아산시의회 의장 오안영, 추진위원장 박응진, 글. 광복회 아산.예산 연합지회장 정해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