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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동자인 원용은과 박창신 두사람이 협혁하여 깃대를 높이 들고 선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할때 날씨는 매우 청명하였으나 바람이 일기 시작하여 태극기는 창공높이 휘날리고 장폭으로 만들어진 현수막은 승천하는 용의 모습이고 꼬지치듯 펄럭인ㄴ 모양은 마치 개선장군이 승전고를 우리면서 입성하는 광경과도 흡사했다. 이렇게 질서정연하고 늠름한 긱세로 행진할때 덕산공립보통학교 심상렬선생님이 퇴근길에 대열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갑지기 두손을 번쩍 들어 그 당시 보통학교 교사로서는 감히 생각도 못할 행동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순간 마치 호랑이등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었다. 그로 인해 우리 전교생은 용기백배 더욱 열광적으로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부르며 학교 정문앞까지 행진했다. 학교에서는 퇴근 준비하던 교사들이 깜짝 놀라 달려나오고 대열앞을 막으며 저지하려 했지만 그 위세는 너무나도 당당하여 막지 못하였다. 우리는 다시 만세를 부르며 주재소(경찰지서)앞을 통과하려 할때 경찰들이 출동하여 강격히 저지하므로 할수없이 해산할수밖에 없었다. 이때 태극기와 현수막은 여지없이 빼앗기고 말았다. 우리는 흩어졌다. 다시 모여 조를 현성하고 맨손으로 만세를 부르려하는데 박래윤, 안인식, 이흥로, 이돈하선생님들이 급히 달려놔와 목매는 소리로 총맞지 말고 어서 도망가라고 호통치는 바람에 사방으로 분산할 무렵 죽기치(다케사끼)라는 포악한 일본인이 총을 들고 추격해 왔으나 큰 위기는 모면하고 각자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원용은은 일부 학생들과 또 다시 모여 몽산과 아미산에 올라 만세를 불렀다. 저녁무렵 산을 내려오며 마을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그리고 원용은은 몸이 불편하여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 다음날 안인식 담임선생은 인편에 은밀히 연락하여 당분간 등교하지말고 집을 피해 있으라는 통지를 보냈으나 원용인은 가족들이 간곡히 만류해도 듣지않고 하루 지난후 불편한 몸으로 등교하여 자진체포되었다. 그 다음날 공주에서 헌병청 경무부장이 헌병대 몇명과 기마병까지 인솔하여 삼엄한 경비를 하였고 경찰들은 사건의 진상과 배후자 검거에 급급했다. 그러나 배후자가 따로 없고 원용은은 혼자했다고 주장하는데 박창신도 자진출두하여 함께 조서를 받고 공주 형무소에 이감되어 4개월만에 석방되었다. 이상은 지금으로 부터 59년전에 원용은외 95명의 3.10 독립만세운동을 선동하여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이 충남에서 제일 먼저 독립만세를 부른 전후상황의 기록을 한 취당 이종원선생의 거사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