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page


81page

3월10일 독립만세운동 거사록 서기 1919년(단기 4252년) 3월 1일 서울에서는 대한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날 원용은은 가족과 함께 상경하여 20여일만에 서울시민들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도로를 점령하고 시가행진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특히 서울시내 남.녀 학생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며 일반대중의 선두에서 열광적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광경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아 벅찬 감격과 울분을 가슴에 안고 귀향하여 우리도 독립운동을 해야된다는 결심을 굳게 가졌다. 원용은은 면천보통학교 제4학년 재학생의 신분으로 동급생 박창신과 만나 은밀히 거사를 모의하고 주동적인 역할을 분담하기로 의논한 다음 각학년 급장과 비밀리에 논의하고 전교생에게 주지시켰다. 원용은은 태극기와 현수막을 제작하며 모든 준비를 서룰렸고 독립운동의 노래 가사는 서울에서 강선필이 가져와서 원규상을 시켜 등사기를 이용 수백배의 인쇄물을 만들어 학생들은 물론 주민들에게 배부할 계획을 세웠다. 또한 단독으로 사재 죽당목(옷감)을 구입하여 자기 집에서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고 현수막도 제작했다. 5미터 이상되는 대나무로 깃대를 만들어 동문 밖 면천향고 뒷산에 숨겨놓았으며 한편 박창신은 인접한 당진, 덕산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에게 우리 거사에 함께 참가하자는 밀서를 보냈다. 그때 밀서 내용 가운데 만약 우리와 뜻을 같이 않는다면 인면수심(사람의 탈을 쓰고 짐승의 마을 가진 인간)이라고 격려와 더불어 몸시 충격적인 모독이며 협박적인 문구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 밀서는 두학교에서 반려되었고 그 후일에 타교학생까지 선동한 죄로 벌을 받게 되었다. 드디어 3월 10일 각각 하교하여 오후 4시경 면천 동분 밖의 저수지를 지나 송림골짜기에 전교생 96명이 모두 모였다. 이때 원용은은 서울에서 본 광경을 상세히 설명하고 우리도 다같이 한마음으로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역설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둔 태극기와 현수막을 꺼내어 대나무 깃대에 높이 달고 대한독립만세라고 대서특필한 3.3미터 길이의 현수막을 앞에 들고 행동개시에 들어갔다. 그때 나 이종원은 4학년 급장이었고, 박성은은 부급장이었는데 당시 보통학교 학제는 4년제이므로 4학년생은 최고학년 상급생이요 동시에 최고학년의 급장 명령이라면 절대 복종이다. 총 책임자인 나는 부급장 박성은과 전체 지휘 통솔을 맡았다. 나는 대열 맨 앞에서 박성은은 대열 뒤에서 이탈자와 낙오자 없도록 일사불란하게 대오를 이끌고 행동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