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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이에 분개한 장군는 애국심이 투철한 유생(儒生)으로서 분연히 항일의병투쟁에 신명을 모두 바쳐 국권(주권)을 수호하고자 1907년 8월 몸소 의병대장이 되어 150여명의 의병을 모아 8월25일 부터 4일간 경기도 안성에서 개최된 의병회의에 이들을 이끌고 참가하였다. 그해 9월까지 용인·안성 등지에서 900여명의 의병들을 규합한 후 이를 3개 부대로 나누어 그 중 300여명의 1개 부대를 직접 지휘하여 다음해(1908) 7월까지 당진·서산·부천·화성·평택·안성·용인등지의 산하(山河)를 누비며 누차의 치열한 전투로 승패(勝敗)를 반복하던중 1908년 7월 19일 당진군 대호지면 적서리 해안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그후 정대장은 1908년 9월 29일 경성지방 재판소에서 교수형 선고를 받고 그뒤 11월 24일 경성 공소원에서 종신형으로 감형 되었으며 그후 다시 징역 3년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르고 석방되어 귀향하였다. 출처 : 당진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