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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 당진은 옛부터 드높은 선비정신과 문화의 향기가 넘치는 고장이었다. 이 자랑스러운 우리고장을 청렴하고 강직한 삶으로 더욱 빛내신 한분 스승이 계셨으니 바로 3선 국회의원과 재무부장관을 지내신 인태식선생이시다. 선생의 본관은 교동이며 서기1902년 12월 17일 당진군 석문면 통정리 519번지 당미마을에서 부친 익수공과 모친 한양조씨 석경 여사의 2남으로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남달이 총명하여 장차 큰 재목이 될 도량을 보였고 7세때에 한문을 배워 익히고 당진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접하고는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여 입신의 앞날을 약속 받게된다. 선생은 웅지를 품고 일본동경으로 건너가 山口고등학교와 東北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면서 수학의 길을 마친다. 선생은 귀국하여 홍천 청주 등지의 세무서장으로 재직하던 가운데 8.15해방을 맞고 광복이후에는 재무부사세국장 관재청장 등 경제행정의 요직을 두루거치면서 건국초기의 혼란스런 경제를 바로 잡고 기초를 다지는데 헌신적으로 노력하면서 탁월한 능력과 공사를 분명히 하는 생활로 많은 사람의 칭송과 존경을 받게된다. 동족상쟁의 6.25전쟁이 휴전되면서 민주정치구현에 큰 뜻을 품고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고향 당진에서 출마 당선하여 정계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선생은 의정생활 2년뒤인 1954년에 재무부장관으로 취임하면서 전후 경제부흥에 많은 흔적을 남겼을 뿐만아니라 당진의 지역발전에도 남다른 열성을 다하셨으니 그 업적 가운데 몇가지를 들어서 기록으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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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당시 서산군에 속해 있던 정미면과 대호지면을 당진군 편입시켜 이 지역주민의 생활편의와 당진의 군세를 넓힌것도 선생의 내 고장 사랑이 이루어낸 결과이었고 예산의 신례원에서 당진으로 진입하는 교량건설도 선생의 작품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당시의 농촌경제 형편으로 서울에 유학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임에 틀림이 없었다. 선생은 이를 딱하게 여기시고 당진의 후학들을 위해 사재를 털어 신문로와 마포에 당진학사를 설립하시고 숙식제공은 물론 장학금을 지급하면서 수많은 인재를 길러내셨으니 그 숭고한 뜻이 어찌 뭇사람에게 회자되지 않겠는가 당진학사를 거처간 인재들이 오늘 이 나라의 원군으로써 관계 학계 언론계 재계 문화계등 각 분야에서 큰 몫을 하고 있으니 그 깊고 크신 뜻에 새삼 감복하고 은혜를 가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