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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승재는 1939년 3월, 충청남도 당진군(唐津郡) 순성공립소학교(順城公立小學校)를 졸업하고, 7월경부터 수원읍에 있는 주식회사 부국원(富國園)과 수원양조회사 등에서 일을 하다가 수원예술호연구락부(水原藝術互硏俱樂部)에 가입하였다. 이 구락부는 한국의 독립을 실현시킬 목적으로 결성한 조직이었다. 맹승재는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고, 교우를 감화시키는 한편, “현재와 같이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적 냉대를 물리치고 조선인에게 진정한 행복을 얻게 하는 데에는 조선에서 일본 제국의 속박으로부터 이탈·독립하고, 그 위에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는 사회를 실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목적 의식을 갖고 있었다. 맹승재는 수원읍 내 팔달산 연무대 등 여러 곳에서 모임을 갖고 대책을 협의하였다. 특히 국내 및 만주와 동경의 독립운동가와 연계하여 한국의 독립 및 신사회 건설을 위한 협의를 하였다. 1939년 12월 20일경 만주로 건너가 항일투쟁 방안을 모색하였고, 12월 하순경에는 일본 동경에 건너가 일본 사정을 살피고 독립운동가와 연결하는 방안을 협의하였다. 1940년 7월 상순 맹승재는 수원극장에서 동지들과 모임을 갖고, 함께 만주에 건너가 실천운동을 위해 필요한 여비 및 여권의 입수방법에 대해 협의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중국 침략을 비난하고, 일본이 외국과 재차 교전한다면 일본의 국력은 소모되어 결국 패전을 하게 되고, 한국독립은 용이하게 될 것이며, 일본 왕의 시조는 중국인으로 일본의 주장은 모두 거짓이라는 등 당시의 국내외 정세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1941년 7월에 맹승재는 농촌에 거주하는 농민과 같이 일하면서, 사회 변혁 사상을 전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동지들과 양축업(養畜業)을 경영하면서 무산자 아동을 거두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이 밖에 맹승재는 1941년 9월 한인의 지원병 참가를 중지시키고 일제의 정치를 비판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9월 14일 오전 10시 수원읍 공설운동장에서 수원군 청년단 수원읍 청년단의 결성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이를 보기 위해 왔던 최용범이 육군지원병 지원자 훈련소 입소자에게 우송하려고 휴대하고 있던 문건이 수원경찰서에 나온 경비원에게 발각됨으로써 맹승재를 포함해 구락부 회원 7명이 체포되었다. 맹승재는 1942년 7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이상 4년 이하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