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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대장 유곡 최구현 선생 묘지문(한글 번역) 선생의 자는 인성이요, 호는 유곡이시다. 선생은 동치 병인년(1866년)에 면천군 매염리에서 출생하여 광서 정해년(1887년)에 무과급제하고, 이듬해 무자년(1888년)에 훈련원 봉사로 벼슬길에 들었다. 광무 8년(1904년)에 이르러 왜가 한일의정서를 핑게 삼아 국정을 압박하여 국운이 가망이 없었다. 이에 선생은 국정을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고 군부참서관 벼슬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을사늑약(1905년)을 당하자 의기를 참을 수 없어 병오년(1906년) 봄에 기지시(당진군 송산면)에 창의도소를 열고 창의문을 널리 써 붙였더니 면천, 당진, 고덕, 천의, 여미에서 의병이 370명이 달려왔다. 여기에서 선생은 창의영도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통솔하고 연달아 15일 동안 의병이 나온 고을을 돌며 위세를 드날리며 행군을 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왜를 쳐부숴야 한다는 의분을 불러 일으켰다. 선생은 4월17일 초저녁 면천성을 공격하였으나 관군과 왜의 수비대가 맹렬히 되받아 쏠 뿐만 아니라 왜의 신식 총포의 위력이 더 없이 강해서 의병의 창과 칼과 화승총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동이 트는 새벽에 총탄이 비오 듯 하는 속에서 죽고 다친 의병을 들것에 싣고 부축하고 눈물을 삼키며 의병을 해산할 때, 선생은 죽기를 한하고 왜놈과 싸워야한다는 의병 36명을 거느리고 밤에만 행군하여 4월23일 난지도에 당도하니 그곳에는 이미 당진 의병과 화성 의병장 홍일초 창의장 군사 등 40여명이 와서 웅거하고 있었다. 이어 윤 4월5일 관군에게 쫓기는 서산의병 참모 김태순 일진 28명이 합류하고, 윤 4월16일 홍주성에서 패한 차상길의병 등 일진 15명이 도착하니 의병이 모두 120여명이 되었다. 이에 왜를 멸망시킬 싸움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간도로 향한 항해를 준비할 때, 7월5일 새벽 관군과 왜 수비대 200~300명이 나무 실은 배로 위장한 세 척의 배로 기습하여 선생은 잡혀서 면천 감옥에 갇히고, 왜 수비대의 악귀 같은 고문으로 선생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동지달에 선생의 전답 30결을 면천 아문에 몰수 당하고 수레에 실려 출옥하였으나 선생은 소생치 못하시고 결국 섣달(12월)23일 축시(새벽 1~3시)에 운명하시니 13세 된 아들 치영이가 숱모루 언덕에 초빈하였다가 이듬해 정미년(1907년) 10윌20일 면천 고잔리 선영 곁에 장사지냈다. 면천창의군 막하군사 삼가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