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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에 무과급제하고 무자년에 훈련원 봉사로 벼슬길에 들고 광무 8년 갑진에 이르러 왜가 한일의정서를 핑계삼아 국정을 압박하여 국운이 희망이 없었다. 이에 선생은 국정을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고 군부참서관 벼슬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을사늑약을 당하자 의기를 참을수 없어 병오년 봄에 창의도소를 기지시에 열고 창의문을 널리써붙였더니 면천 당진 고덕 천의 여미에서 의병 370명이 달려왔다. 여기서 선생은 창의령도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통솔하고 연달아 15일동안 의병이 나온 고을 돌며 위세를 드날리며 행군을 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왜를 쳐부숴야한다는 의분을 불러일으키고 4월 17일 초저녘 면선청을 치니 관군과 왜수비대가 맹렬히 되받아 쏠뿐만 아니라 왜의 신식 총포의 위력이 더없이 강해서 의병의 창과 칼, 화승총으로는 도저히 감당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동이트는 새벽 총탄이 비오듯하는 속에서 죽고 다친 의병을 들것에 싣고 부축하고 눈물을 삼키며 의병을 해산할때 선생은 죽기를 한하고 왜놈과 싸워야 한다는 의병 36명을 거느리고 밤에만 행군하여 4월 23일 난지도에 당도하니 당진창의병과 화성창의장 홍일초 군사등 40여명이 이미 와서 웅거하고 있었다. 이어 윤4월 초5일 관군에 쫓기는 서산의병참모 김태순의 1진 28명이 합류하고 윤4월 16일 홍주성에서 패한 차상길 의병등 1진 15명이 도착하니 의병이 모두 120여명이 되었다. 이에 왜를 멸망시키 싸움을 지속키위하여 간도를 향한 항해를 준비할때인 7월 초 5일 새벽 관군과 왜 수비대 2,3백명이 나무실은 배로 위장한 3척의 베러 기습하여 선생은 잡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