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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대장 최구현선생 묘소 선생의 자는 인성이요 호는 유곡이시니 본관은 경주고 1866년(고종3) 면천군 매염리(현 매곡리)에서 통정대부 최영환공의 장자로 탄생하여 1838년 무과급제후 훈련원 봉사로 벼슬길에 나아가 군부참서관으로 재임중 1904년 일제의 강요로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자 선생은 국운을 탄식하고 위 관직을 하임하셨는데 1905년 일제는 조선대신들을 협박하여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조선이 망국하게 되자 선생은 5000면 조선민족이 하루아침에 일제의 노예가 될 수 없다는 의분을 억제할수없어 1906년 창의도소를 송악면 기지서 장터에 설치하고 의기를 높이 꽂고 창의문을 지어서 방을 붙혔더니 면천, 당진, 고덕, 천의, 여미에서 의병 370명이 달려왔다. 이에 선생은 의병회의에서 창의영도장(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통솔하고 보름동안 의병이 나오느 고을을 행군하면서 의기를 선양하여 백성의 항일의분을 불러 일으키고 4월 17일 초저녁 면천성을 총 공격하였는데 관군과 왜수비대의 치열한 반격과 왜병의 신식총포의 위력이 몹시 강했지만 그대로 의병은 밤새 결사적 공격을 퍼부었으나 의병의 창검과 구식 화승총으로는 대적할 수 가 없었다. 그래서 동티 트는 새벽녘 총탄이 쏟아지는 속에서 죽고 다친 의병을 들것에 싣고 부축하고 눈물을 삼키면서 의병을 해산하고 선생은 결사대 36명을 이끌고 밤에만 행군하여 4월 23일 배를 얻어타고 난지도에 당도하니 당진의병과 화성의병장 홍일초 의병등 40여명이 먼저와서 웅거하고 있었으며, 그 뒤 윤4월5일 관군에 쪽기던 서산 의병참모 김태순등 의병 28명이 합류했고 윤4월 `6일 홍주성에서 패한 차상길등 의병 15명이 들어오니 의병은 모두 120여명이 되었다. 이에 의병들은 왜병과의 싸움을 계속하기 위하여 간도로 가려고 항해준비를 할때인 7월 5일 새벽 관군과 왜수비대 200~300명이 나뭇배로 위장한 3척의 배로 기습하여 선생은 황망중 대항하였으나 그들에게 체포되어 면천감옥에 갇히시고 왜수비대의 악귀같은 고문으로 선생이 거의 죽을지경이 된 동짓날(11월) 선생의 전답 30결을 면천아문에 몰수 당하고 업힐 수 조차 없어 소수례에 실려 가출옥하였으나 선생은 희생치모하시고 결국 섣달(12월) 23일 미명 운명하시니 이때 13세된 아들 치영이가 숱모두언덕에 초빈하였다가 이듬해(1907) 10월 20일 면천 고자리 선영곁에 장사지냈다. 2003년에 이 묘역에 이장하여 모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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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을 대표하는 의병장의 행적이 뒤늦게 알려지기까지의 뒷이야기 최구현의병장은 1906년, 일본군과의 전투 중 체포되어 모진 고문의 휴유증에 서거하셨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공개될 수 없었기에 최구현의병장의 행적은 10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땅속에 묻혀있게되었다. 솢나 충묵공이 75세되던 2003년 양력 9월 17일 새벽, 꿈에 대궐같이 큰 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40대의 갓과 도포를 쓴 선비가 문패를 빠뜨리고 왔으니 찾아오라고 하여, 잠에서 깬 후 꿈의 의미를 되새기던 공은 날이 밝은 후 우천중임에도 홀리 당신 무수리에 가서 공이 태어나기 몇해전까지 최구현의병장이 모셔져 있었던 옛 묘소자리 앞쪽부분을 파헤치던 중 석고로 만들어진 묘비석을 발견하고 내용을 화깅ㄴ한후 내리는 비를 맞으며 목 놓아 통곡하였다. 묘지석의 출토이후 애뇽이 학계의 고증으로 확인된 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8월 15일 최구현의병장께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으며, 그가 이끈 의병 할약상은 2005년 8월, SBS서울방송사 제작, 광복 60주년 특집 2부작 드라마 '소난지도의 영웅들'로 전국적으로 텔레비젼에 방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