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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 행업을 그 후손왕이 대신 사죄한다는 참회선언이며 비장한 자주독립 선포였다. 그 후 왜는 대한제국을 감싸고 도는 아라사를 쳐부수려고 항일전쟁을 일으킨후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대한제국은 왜를 당할 무력이 없었고 아일전에 아라사가 패한데다가 일제의 대한제국 점령통치를 미제가 묵인한다한 데프트가 쓰라린 비밀협정으로 미제의 후원을 얻은 왜는 을사년 11월 17일 왜병이 대한제국 시위대를 제압하고서 경복궁을 포위한 상태에서 왜가 고종황제의 대신들을 협박하여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니 대한제국은 외교권이 박탈되므로 망국의 길에 빠지고 말았다. 아! 천지가 공멸하도다! 오천년역사의 조선민족이 왜의 노예가 된다는 것인가? 이 처절한 망국과정을 알게된 유곡 최구현선생은 끓어 오르는 의분을 이기지 못하고 오직 멸왜구국 자주독립 일념으로 항일의병전쟁에 이 한 목숨 받치셨으나 일제강점과 계속된 미제점령으로 굴절된 역사속에 여태까지 선생의 항일의병전쟁사실이 잊혀졌더니 선생의 군국97년만에 발굴된 선생의 묘지로 선생의 사적이 밝혀졌는데 선생은 임진왜란에 순국하신 선무원종공신 충신공 최준립장군의 12대손이시고 선친 휘 최영환공은 승문원 부제조를 역임하시고 갑오농민전쟁때 면천농민군지도사였으니 선생의 항일의병전쟁까지 300년 항일전쟁에 목숨바친 명왜호국가문이시다. 그 선생의 한문묘지가 백년전 항일의병전쟁기록이 생생하여 그 묘지국역문을 여기에 양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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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대장 유곡 최구현 선생 묘지 국역문 선생의 자는 인성이요, 호는 유곡이시니 선생은 동치 병인 면천군 매염리에서 출생하여 광서 정해 무과급제하고, 무자 훈련원 봉사로 벼슬길에 들고 광무 8년 이르러 왜가 한일의정서로써 국정을 압박하여 국운을 난망하였다. 이에 이르러 선생은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고 군부참서관 벼슬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을사늑약을 당하여 의기를 이기지 못하고 병오년 창의도소를 기지시에 개설하고 창의문을 써서 방을 붙혔더니 면천, 당진, 고덕, 천의, 여미에서 의병으로 달려온자가 370명이 되었다. 여기서 선생은 창의영도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통솔하고 연달아 15일 동안 의병으로 나온 고을길을 시위행군하여 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왜를 쳐부숴야 한다는 의분을 불러 일으키고 4월17일 초경 면천성의 관군과 왜 수비대를 들이치니 관군과 왜 수비대의 응사가 치열하고 왜의 신총포의 위력이 막강하여 의병의 창검과 화승총으로 감당할 수가 없어서 드디어 오경에 총탄의 빗속에서 죽고다친 의병을 들것에 새벽에 총탄이 비오 듯 하는 속에서 죽고 다친 의병을 들것에 싣고 업고 부축하고 피눈물을 삼키면서 의병을 해산할 때, 선생은 한사코 왜와 싸워야한다는 의병 36명을 거느리고 밤을타고 행군하여 4월23일 난지도에 배를 얻어타고 당도하니 당진창의병과 화성창의장장 홍일초 군사 등 40여명이 이미 와서 웅거하고 있었다. 여기에다 윤 4월초5일 관군에 쫓기는 서산의병 참모 김태순 일진 28명이 합류하고, 윤 4월16일 홍주성에서 패하고 달려온 차상길의병 일진 15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