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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무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가 되었다. 1904년 일제가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자 이에 항거하여 군부(軍部) 참서관을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를 계기로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1906년 봄 창의도소(倡義都所)를 기지시(機池市)에 설치하고 창의문(倡義文)을 각처에 포고하자,면천(沔川)·당진·고덕(古德)·천의(天宜)·여미(餘美) 등지로부터 370명의 의병이 모였다. 이 의진의 창의영도장(倡義領導將)이 된 그는 휘하 의병을 이끌고 4월 17일 면천성(沔川城)을 공격하였으나 화력의 열세로 패하고 말았으며, 그 직후 부득이 의진을 해산하였다. 정규 의진을 해산한 직후인 1906년 4월 23일에는 결사항전의 결의를 다진 36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당진(唐津) 소난지도(小蘭芝島)로 들어가 의병활동을 지속하였다. 이때 소난지도에는 이미 또다른 당진의병과 화성창의장(華城倡義將) 홍일초(洪一初) 휘하의 군사 등 40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이들 의병세력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로 하였다. 그 뒤를 이어 윤 4월 초5일 서산의병(瑞山義兵)의 참모 김태순(金泰淳)이 거느린 의병 28명이 합류해 왔으며, 윤 4월 16일에는 홍주성전투에서 패한 홍주의병의 일부인 차상길(車相吉)이 거느린 의병 15명이 도착하니, 소난지도에는 모두 120여 명의 의병이 주둔하게 되었다. 이들은 장기적인 항일전을 벌이고자 간도로 가기 위해 그 준비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1906년 7월 5일 새벽에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의병은 사산되고 주모자들은 체포되고 말았다. 이때 체포된 그는 면천감옥에서 일본군으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았다. 1906년 말 무렵 답(畓) 30결(結)을 수탈당한 뒤 출옥할 수 있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1906년 12월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