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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학자라 함은 경전에 효달하고 삼다를 갖추어 천자영민과 방정돈후하며 학덕이 겸비하여 지행일체로 청순한 심성과 고귀한 인품으로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 존경과 사랑을 받는 선비를 이름이니 바로 방재 정재학 선생이 그 표상이시다. 방재 선생은 존재 유진하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식견이 높아지고 학문이 크게 성취되어 무망의 계율을 지니게 되셨다. 선생은 큰 뜻을 품고 춘천으로 유학 독립운동가이고 한말의 성리학자이신 의암 류인석 선생 문하에서 사문의 종지인 3대의제인 수의 거의 순의를 익혀 심열성복의 경지에 이르셨다. 1907년 의암 선생께서 일제의 감시를 피하여 다시 요동으로 건너가시게 되어 해서(황해도)까지 가서 배웅하고 귀가하여 문을 닫고 자정하던 중 명성을 듣고 많은 이 모여들어 문을 열고 후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선생은 봉호에서 일생동안 사시면서 배일의식이 투철하시어 평생 전형을 고치지 아니하고 효제를 부식시키니 향당에 미풍양속이 크게 진작되었다. 또한 선생은 성리학의 오묘한 이치를 구명하기 위하여 선학으로 연원대가인 민단운(병승) 김충암(낙원) 송강와(면헌) 정소당(해문) 제유와 천리답연하여 정려한 작품과 연심한 학문과 덕성이 정대한 경지에 이르렀고 문장은 첨부한 수준에 이르렀으며 시율은 전아장중하고 청신하여 성당의 기운이 있었고 필법 또한 묘한 경지에 이르러 사우들로부터 흠모와 추앙을 받으며 화서학맥을 잇는 도학자로서의 참된 삶을 사셨다. 군사부일체의 도리를 따라 문인 15명이 방재 선생 추모계를 조직하여 3권의 문집을 발간하고 묘답을 마련하여 1970년 이후 매년 묘정제를 올려왔다. 이제 문인들이 세상을 뜨고 2세들이 승계하여 왔으나 세계역속으로 묘정제를 이어갈 수 없게 되어 부득이 묘답을 정리하여 추모의 정성이 담긴 추모비를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천학비재로써 외람됨을 무릅쓰고 선생의 행장을 약서한 바 선생의 위덕에 흠절이 되지 않을까 송구스럽다. 방재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비에 기록하니 그 여광이 길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전 당진 부군수 겸 성균관 전의 우정식 근찬 대한민국 서예대전 초대작가 남계 조종국 표제 근서 추모비 건립 서기 2015년 4월 2일, 건립주체 방재 선생 추모계 대표 우정식 건립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