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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난지도 의병은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침탈되자 경기도 수원지방에서 거병하여 세력이 막강했던 홍원식휘하의 의병들이 일군의 초토화 작전에 밀려 충남 당진으로 건너와 당시 호남등지의 관곡 운송선들의 중간 정박지였던 석문면 소난지도에 의병 본진이 주둔하게 되었다. 소난지도는 육지와 떨어져 신변안전과 식량조달이 용이한 조건등으로 의병들이 이곳에서 재기를 도모하던중 이를 탐지한 한.일 순사 15명이 솔가지로 위장한 배로 기습하여 1908년 3월 15일 9시간 동안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의병들의 탄약이 먼저 떨어지면서 섬 동쪽 해변 딴 섬까지 밀리며, 육탄전으로 대항하다가 끝내 41명 전사, 9명 부상, 50여명이 바다에 투신하여 의로운 최후를 맞게 되어다. 당시 목격자들에 의하면 온종일 총소리가 콩 볶는 듯 하였고, 피맺힌 절규와 비명소리가 진동하였으며 화약연기가 온 섬을 뒤덮었다고 하니 얼마나 처절한 전투였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의 시신은 바닷물에 떠내려가 고기밥이 되었는가 하면 그물이나 밭에 걸려 곳곳에 가매장되거나, 남은 시신은 장안여 격전지 해변에 웅덩이를 파고 매장되었다. 당시 의병장 홍원식은 왜국에 죽기보다는 차라리 자결하기로 결심하고 절벽아래 바다로 몸을 던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중간의 소나무에 옷자락이 걸려 살아나서 상복변장 하고 당진방면으로 피신하여 수원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부상당하여 화성 제암리에 은거하며 교육사업을 하던중 제암리 사건때 순국하였다. 그런데 소난지도 의병항쟁은 이보다 먼저 1906년 4월 당진군 송악면 기지리에서 을사늑약에 항의하여 창의도서를 설치하고 의병 370을 모집하여 1906년 5월 10일 면천성을 공격한후 소난지도로 들어간 최규현(호 유곡)의병장과 화성 창의장 홍일초, 서산의병 참모 김태순, 홍주의병 차상길등 의병 120여명이 같은해 8월 24일(음 7월 5일)에 일본 경찰대의 기습공격을 받고 소난지도에서 싸운 사실이 새롭게 고증되었다. 국권을 되찾으려는 우국충정만으로 봉기한 의병들이었기 때문에 무기도 변변치 못했다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었지만 진충보국과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일제의 강압에 맞서 싸웠던 소난지도 의병항쟁은 이후 질곡의 시대를 거치면서 단절의 역사속에 묻히고 멸실될 위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오랜 세월 돌보는 이 없이 풍랑에 씻겨 유골이 나와 딩굴기도 하여 약효에 현혹된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에 의해 도굴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이 같은 사실을 안타깝게 여겨운 석문중학교 고 신이균 이사장과 김부영 교장등이 1970년 교직원및 학생들과 최을용씨등 소난지도 주민들과 함께 흩어진 유골을 수습 봉안한후 묘역을 정비하여 호국의 열과 애국심 고취의 정신도장으로 삼아 매년 현충일 참배행사를 거행해 왔다. 한편 신양웅교사(현 석문중학교 교장)가 중심이 되어 끈질기게 사료수집활동을 벌려 1980년 88세로 작고한 조예원 옹의 증언을 녹취하는등 고증자료 수집에 힘써 오던중, 1982년 8월 5일 의병총비를 건립하고 소난지 의병항쟁 기념사업회가 발족되면서 거군적으로 추모행사를 거행해 오고있다. 2003년에는 당진군에서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김상기 교수에 용역을 주어 학술고증을 받아 11월 20일에는 학술대회를 열어 학계에 보고되었다. 그후 2004년부터 매년 3월 15일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