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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식선생송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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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식선생송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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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독립운동기념탑 건립취지문 민족의 굴욕은 죽음보다 참기어렵고 자유의 희원은 생명보다도 강한것이기에 치욕의 역사를 씻으려고 일본제국주의의 총칼에 맨주먹으로 항거한 이고장 사람들의 독립만세 함성과 애국선열의 높은 뜻을 이곳에 되새기니 자손만대 온세상에 길이 빛나리라. 이고장은 산자수명하고 의로서 위정명덕 신민의 기틀을 삼으니 옛부터 인걸이 출중하며 충신열사가 많이 나와 한말에 의병활동과 국권회복운동이 일어난곳이다. 4.4독립운동은 남주원, 이두하, 남계창, 남상직, 남상락이 파고다공원의 3.1운동에 참가하고 돌아와 독립운동할것을 다짐한것이 동기가 되어 민재봉, 강태원, 송재만, 김동운, 남주원, 한운석, 이인정, 이춘응, 이대하, 남상집, 김홍균, 홍순국, 백남덕, 남청혁, 홍월성이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추진위원회를 조직 천의장날에 결행하기로 했다. 1919년 4월 4일 대호지면 광장에서 면장 이인정의 연설, 남주원 독립선언문 낭독 그리고 한운석이 작사한 애국자 제창이 있은후 송재만 선서에 이어 만세시위에 들어가 천의사장으로 이어졌으며 어느새 정미면민들이 합세한 천여명의 가두시위가 남주원, 이대하, 한운석의 독립만세운동에 열기를 북돋워 천의장터는 만세의 도가니가 돼 오후 네시경 이정보를 듣고 달려온 당진경찰서 늬미야 다까시마가 권총을 발사 평화적 시위가 일시에 투석전으로 돌변하여 천의 일경 주재소가 파괴되었다. 이 사건으로 우에하라를 비롯 많은 일경이 생포 구타되며 일본인 다지리 집에 숨겨둔 무기를 빼앗아 무장해제까지 시키고 이연종구장은 당시 무너진 정미 대운산교 교량복구 지연책으로 서산, 홍성 수비대의 출동이 늦어져 피해가 적었다. 4월 8일 또다시 송전리, 조금리, 수당리에서 재봉기하였다가.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 구속된 열사가 삼백여명 현장학살로 순국한분이 송봉운외 3명, 옥중에서 고문치사당한분이 이달준, 박경옥, 김일도 3명, 수형인 36명등 150여명이 구금 또는 태형되기도 하였다. 이는 오로지 굳건한 애국의 신념으로 한발국의 머뭇거림도 겁냄도 없이 우리나라 민족사에 영원 불명 횃불이 되셨기에 이른것이다. 탑 고안은 당진 김창의교수가 글은 반곡 박상건선생이 글씨는 늘빛 심응섭 교수가 옮겨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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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도'는 '김도일;지사의 이름을 잘못 쓴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