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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박경현 공 추모비 공이 돌아가신 지 어언 40여 년이 넘었다. 그러나 위로는 높은 관리로부터 아래로는 나무하고 소치는 아이들까지 모두 공의 의로움을 추모하니, 공을 칭송하는 기풍(風)을 이에서 7할은 상상해 볼 수 있다. 공의 휘(諱)는 경현(이고 자(字)는 여직(汝直)이니 명문 순천박씨이다. 성격이 호방하고 강직하여 절조가 있어 기상이 모든 사람에 으뜸이었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의로움과 이로움을 분별하여 냉정하고 엄격하기가 추상(秋霜)같았다. 세상을 내려다보며 남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을 좋아하였다. 대한제국 말기에 본 군의 군수가 장물죄를 범하여 군민들이 매우 분개하였는데 공이 의관(義館) 김학권과 전주 영문에 대리 소송을 하여 승소하였다. 이렇듯 고을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공의 한마디 판결의 말을 기다렸다. 35세 때 아내를 잃었는데 이후 다시 배필을 구하지 않았다. 주위에서 재혼을 권하는 이가 있으면 그때마다 "가정에서 화목하지 못하는 것이 이 일로 인한 경우가 많다."라고 하였다. 성품이 의협심이 강하여 집안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명산이나 이름난 사찰을 두루 유람하였으며 때로는 약초를 캐어서 술값을 갚기도 하였다. 경술(庚戌,1910)년 나라가 없어진 때부터 항상 통분한 마음을 품고 나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을 기쁘게 여겼는데 무오(戊午,1918)년에 상황(上皇,고종)이 승하하고 그 다음해 3월에 전국에서 궐기하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 공은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즉시 저자 가운데로 들어가 국기를 들고 크게 만세를 외치니 온 시장 사람들이 호응하였다. 왜인 헌병들이 사방을 포위하고 총을 쏘아대자 공은 가슴을 내밀며 앞으로 나서며 "나를 빨리 죽여라"라고 하며 더욱 강경하게 꾸짖는데 눈빛이 마치 번개와도 같았다. 마침내 체포되어 옥에 갇히었는데 같이 연루된 이들이 매우 많았으나 공이 모두 감당하고 가혹한 고문에도 끝내 한 사람도 발설하지 않아 온 고을이 안전하였다. 9개월 만에 석방되었는데 매번 지팡이로 동쪽을 가리키며 "저 왜놈들은 같은 하늘아래 살 수 없는 원수이다."라고 하였는데 울분과 불평한 기운이 취하여 꾸짖는 말에 자주 드러났다. 계해(癸亥,1923) 8월 2일에 돌아가시니 철종 기미(己未.1859)에 태어나 향년 65세였다. 아, 맨주먹으로 나서서 비처럼 쏟아지는 탄환 속에서 적을 꾸짖었으니 죽지 않은 것이 요행일 뿐이다. 감옥살이 1년 사이 의로운 명성은 이미 나라 밖까지 진동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한창 강성한 원수의 적을 꺾고 끊기었던 국가의 맥을 다시 소생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을유 (乙丙. 1945)년 광복(光復)은 공을 비롯한 여러 의사들의 이 한 번의 거사가 그 조짐이 되었다고 아니 할 수가 없다. 왜적이 물러간 뒤에 도내의 지난날 다른 의사들은 모두 비에 이름을 남겼는데 공만은 기술함이 없어서 사람들이 이 점을 아쉽게 여겨 군수와 각 기관장에게 상의하여 돌을 마련하고 그 장한 행적을 표하려 하면서 나에게 글을 요구하여 만세를 불렀던 옛 시장에 세우려 한다. 아, 그의 높은 의로운 기풍은 지리산[智異山]과 함께 길이 빛날 것이다. 병오(丙午,1966) 11월 10일 안동 김정희(安東 金正會) 짓고, 해주 정상수(海州 鄭相洙) 쓰다. 단기(檀紀) 4300년 정미(丁未,1967) 3월 1일 구례군민 일동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