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page


129page

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중인 1926년 9월, 식민지배하의 민족차별에 대하여 독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교생 장재성, 광주농업학교 박인생 등과 동지가 되어 항일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동년 11월 3일에 당시 광주 부동정에 있는 최규창의 집에서 그를 비롯한 광주고보, 광주농업생 16명이 모여 조국의 독립·사회과학 연구·식민지노예교육체제반대 등을 강령으로 하는 항일학생결사인 성진회를 조직하고 부서 및 결의사항을 정하였다. 동회의 명칭은 그의 제의에 따라 성진회로 정하였으며, 그는 동회의 총무를 맡았다. 동회의 운영은 월회비 10전, 매월 제1·3토요일에 모여 민족적 교양의 함양과 사회과학을 통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연구하기로 하였다. 또한 회원들은 비밀엄수와 동지포섭 등으로 조직확대에 힘쓰기로 하였다. 그런데 회원 중 이반자가 생겨 기밀누설의 위험이 있고 또한 주동학생인 그와 장재성·박인생 등의 졸업으로 인하여 조직 내용을 전환시킬 필요가 있었으므로 1927년 3월에 회원 정남균의 집에 모여 성진회를 해체하였다. 그러나 동회의 해체는 형식적이었을 뿐으로 주동학생들의 활동은 계속되어 나갔다. 1927년 3월에 동교를 졸업한 그는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시위 후 성진회와 관련, 피체되어 1930년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항소하여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
129page

壺山 王在一 志士 像(호산 왕재일 지사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