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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人(의인) 안종삼 서장의 발자취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대전에서 부산으로 후퇴를 거듭했다. 당시 지리산 자락은 빨치산의 주무대로 좌우익 대립이 극심했다. 안 서장에게 황급한 명령이 당도한 것도 그 무렵, 수감된 보도연맹원들을 사살하고 즉시 퇴각하라는 지시였다. 비록 '좌익'이란 딱지가 붙었지만 이념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평범한 주민들이었다. 인민군이 남원까지 내려오자 전선은 더욱 급박하게 돌아갔다. 장고를 거듭한 안 서장은 1950년 7월 24일 오전 11시 경찰서 뒷마당에 수감자 전원을 불러 모았다. "여러분을 모두 방면합니다. 내가 만일 반역으로 몰려 죽는다면 나의 혼이 480명 각자의 가슴에 들어가 지킬 것이니 새사람이 되어 주십시요." (광복 30년사. 전남일보. 1975년) 절망에 빠진 수백의 생명이 일시에 소생하는 순간이었다. 낙동강 전투를 끝으로 세 달 만에 찾은 구례는 여느 곳과 다르게 평온했다. 목숨을 내건 안서장의 용단이 '피의 보복'으로부터 군민 모두를 구한 것이다. 감복한 그도 영전을 마다하고 두 번째 서장을 맡았다. 얼마 뒤 안 서장은 잔당 소탕과 치안 회복의 공로를 인정받아 총경 승진과 함께 지리산지구 경찰전투사령부 정보참모에 임명됐다. 군민들은 떠나는 그의 공덕을 칭송하는 병풍과 '선생의 은혜는 동정호처럼 깊고, 덕은 방장산 같이 높다(恩深洞庭湖 德高方丈山)'라는 뜻의 시구를 선사했다. 안 서장의 아호 '호산'은 바로 시구의 끝 글자를 딴 것이다. (구례군지 上권. 2005년) 2012년 7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