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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사적지 항일독립지사 노임수 의사 노임수(盧琳壽) 1876.5.24~1911.3.2 이명 共壽(공수), 仁先(인선) 노임수는 전남 곡성 출신으로 의병활동 중에는 인선이라는 이름을 썼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늑결되자 유원중. 조규하 등과 함께 의병 수백명을 모집하여 석곡면과 삼신에서 적과 교전하여 적 7명을 사살하였다. 1907년 노인선은 대체로 김동신 의진에 소속되어 활약하였다. 본래 김동신은 1906년 민종식과 더불어 거의할 것을 약속한 바 있었으나 민종식 의진이 먼저 홍주에 입성하여 크게 깨진 후 서로 연락이 두절되었으므로 독자적 의진을 형성하여 의병장이 되었다. 김동신 의진은 주로 전북 무주군 덕유산과 정읍 내장산 그리고 구례 지리산 등의 산악지대를 등지고 활약하고 있었다. 특히 1907년 9월 이후에는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약하여 적군을 크게 교란시켰을뿐 아니라 고광순 의진과 합진하기도 하였다. 그즈음 노인선 역시 순천과 구례 등지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그러한 인연으로 김동신과 잠시 합진하여 그 지휘를 받아서 곡성군과 남원군 일대에서 전투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김동신이 오랜 전투생활 중에 득병하여 의병활동이 원활하지 않게 되자, 노임수는 1908년 4월(음 3월) 김동신 의진에 소속되었던 의병 중 뜻이 맞는 28명과 합세하여 새로운 의진을 형성하고 의병장이 되었다. 김동신은 6월에 신병 치료중 체포되고 말았다. 그러나 의진에 소속된 의병중 노임수를 비롯하여 유종환.문태익.최정근.성문길.차은표.오대근.국인묵.임병주 등이 독자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노임수는 처음에 총 21정을 휴대하였을 뿐 이었으나 곡성.구례.낙안 등지에서 적과 교전하는 등의 활약을 통하여 왜적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4월 16일에는 신정우 의진의 20명과 합진하여 곡성군 죽곡면 상계리에서 육군 수비대 및 일경과 교전하였으나 크게 패하여 의병이 분산되는 피해를 입었다. 1908년 11월 24일 끝내 적에게 체포되어 1909년 1월 교수형을 선고받고 형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